[1/1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강론]

1.

어제 후회가 막심했다. 밤새 아침을 내다보며 고생했다.

김종호 신부님과 제가 미사를 나누어서,

어젯밤에는 김신부님이 하고, 오늘 아침에는 제가 하기로 했는데,

어제 밤미사에서 김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니 너무 좋았다.

제가 하고 싶던 말씀을 먼저 다 해 버리시니까, 저는 밤새 아침에 할 말을 준비하느라 고생하였다.

어젯밤 미사를 내가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돌아보면 후회이고, 내다보면 고생이다.

그래도 어젯밤 뒤를 돌아보고 앞을 내다보았으니 제대로 정월을 맞은 셈이다.

 

정월을 라틴어로 Ianuarius라고 했다.

Janus의 달이라는 뜻인데, Janus는 로마 신화에서 문을 지키는 신이다.

그에게는 샴 쌍둥이 같이 얼굴 두 개가 붙어있다.

문을 지키려면 문의 양쪽을, 앞뒤와 안팎을 동시에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 해를 마치면서 누구나 지난 시간을 돌아본다.

새해를 맞으면서 누구나 미래를 내다보면서 꿈에 부푼다.

그래서 Janus의 달이고, January이고 정월이다.

 

그래서 성찰과 희망은 한몸이다.

성찰하지 않으면 희망하지 않은 것이다.

지난 날을 바로 보는 것은 앞날을 바로 가꾸는 것이다.

 

우리는 좋은 날에 이렇게 말한다. 하루하루가 오늘만 같아라.

그래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끝기도를 하고,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기도를 한다.

 

2.

오늘 복음은 여드레의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모님의 출산과 아기에게 이름을 주는 명명(命名) 사이의 시간이다.

 

출산은 잉태의 끝이고, 명명은 소명의 시작이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바로 마리아의 끝기도이고 아침기도이다.

그러나 기도를 로마 신화에 나오는 야누스의 성찰과 희망 정도로 축소시키면 안된다.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루카 2,21)

잉태되기 전부터 잉태를 완성한 후까지, 시작부터 끝까지,

마리아는 천사를 의식한다.

그것이 마리아의 기도이다.

 

기도란

시간의 흐름에서, 인생의 흐름에서,

출산과 성장과 소명과 투신에서, 삶과 죽음에서,

하느님의 개입을 보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개입하시나?

 

예수라는 이름은 Yehoshuah가 그리스 식으로 변형한 것으로,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구원이라니? 그 거창한 뜻에 비하면 시작이 너무 초라하다.

아기, 그것도 짐승의 구유에 누워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아기에 관하여, 오늘부터 “여드레” 전에, 목자들이 들은 말이 무엇이었나?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때에 목자들이… 서둘러 가서…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루카 2,16)

기도란,

하느님께서 웅대한 완성의 미래를 펼치시는,

현실의 초라한 시작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래서 서둘러 왔던 “목자들은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고,”(루카 2,20)

그래서 우리가 주일과 대축일에, 주님의 부활을 기리고 내다보며, 대영광송을 바친다.

 

3.

어제 김신부님께서는

내일 있을 [이 성전에서의 마지막 미사]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마지막을 앞두고 모든 것이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는 내용이었다.

 

마지막은 새로운 시작이다.

시작은 언제나 초라하다.

시작은 언제나 불안하다.

 

이제 마지막과 시작의 문턱에 서서,

여드레가 차서(루카 2,21),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을 받는 아기 앞에서,

오늘, 반포성당에 묻는다.

천사가 일러 준 우리의 이름은 무엇이며, 천사가 일러 준 우리의 소명은 무엇인가?

 

겨우, 저물어 흘러간 2021년 열두 달을 돌아보고

다가올 2022년의 365일을 바라보아서는 대답하기 어렵다.

 

이만한 성전을 다시 짓지 못할 것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성전을 다시 보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왜, 내일, 이 성전에서 마지막 미사를 해야 하나?

 

구반포만큼

넉넉한 사이사이에 아름다운 나무들을 다시 심고 가꾸지 못할 걸 알면서도,

아무도 구반포의 마지막을 막을 수 없고,

그래서 아쉽고 아까운 줄 알면서도,

아무도 새 구반포의 시작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어느 누구라도, 내일 이 성전에서의 마지막 미사를 막고 싶다면,

구반포의 마지막을 먼저 막거나,

서울 한복판 교통의 요지인 [구반포의 운명과 반포성당의 소명]을

떼어서 갈라놓고 막기 바란다.

 

기껏 새 성전을 공들여 지어 놓아도, 좋은 말 듣기는 이미 틀렸다.

겨우 500평 남짓한 대지에, 적어도 1,000명을 수용하려면,

그만큼 다른 용도의 공간을 축소하고 포기하고, 찌그러뜨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상의 소음과 평가를 흘려버릴 일이다.

오직, 그 아기에 관한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시는

성모님을 바라보고 따를 일이다.

 

태초에 원조들이 짐승에게 이름을 붙여주며, 창조의 숨을 나누어 쉬셨듯,

구세주 나시던 밤, 목자들이 양들과 숨을 나누어 쉬듯,

여드레 전, 마구간의 짐승과 숨을 나누어 쉬시던 아기 예수님 곁에서

우리도 함께, 깊은 숨을 마시고 한껏 내쉬어 보자.

세상을 흐르는 “여드레”(루카 2,21)의 시간이

“사흘 안에”(요한 2,19) 영원으로 바뀌는 신비에 잠길 때까지,

안나와 요아킴의 따님이 천주의 성모가 되시는 은총을 볼 때까지.

 

오늘이 정월 초하루인가?

돌아보니 보람이요, 내다보니 설렘이라면,

시간의 시작과 시간의 완성을 잇는 십자가에 있을 것이다.

 

자, 2022년이다. 임인년이다. 새해이다.

자, 마지막이요,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