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1 그리스도왕 대축일 ∙ 본당의 날 강론]

1.

Earn it.

수능이 끝나고 여행 제한도 풀린다니, 이제 영어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오늘은 강론을 처음부터 끝까지 영어로 한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 중간은 한국어로 한다.

 

영어에서 ‘earn’이란 말은 ‘돈을 벌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부모님이 자녀에게 용돈을 주면서 “earn it” 하고 말하면 아껴 쓰라는 말이다.

네가 땀 흘려 번 돈처럼 귀하게 쓰라는 뜻이다.

 

운동을 가르치면서 “earn it” 하게 되면,

꾀 부리지 말고, 힘들게 훈련해서 네 것으로 만들라는 뜻이다.

 

현충일의 추모사에서 “earn it”이라고 말하면,

순국 장병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뜻이다.

 

세계 제2차 대전, 6년 동안 미군의 전사자는 42만 명에 이른다.

한 해 7만 명이고, 어림잡아 한 달에 6천 명, 하루에 2백 명이다. 매일.

 

한 집안, 형제 네 명이 몽땅 전쟁에 나가 3명이 전사하였다.

집에서 아들들을 기다리던 홀어머니의 마음이 오죽하셨을까?

“하나 남은 막내라도 찾아서 어머니께 돌려보내라.”

[Ryan 일병 구하기]는 대통령의 명령이었다.

 

상륙작전이 벌어진 노르망디 해변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이미 죽은 사람들과 곧 죽을 사람들이다.

거기서 천운으로 살아남은 밀러 대위가 7명의 부하와 함께 적진 깊숙이 들어간다.

그까짓 작대기 두 개, 겨우 일병 하나 구하기 위해서.

대원 여섯 명을 잃었고, 마지막에 밀러 대위도 총을 맞는다.

그것도 포로로 잡혀서 처형될 걸, 자신이 살려서 보내주었던 적군 병사의 총에.

가슴의 총상에서 뿜어 나오는 피를 손으로 막으면서, 그는 이 말을 남긴다.

“Earn this, earn it.”

“내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마라. 반드시 살아서 어머니께 돌아가라. 잘 살아라.”

 

노르망디에는 연합군 전사자의 묘지가 있다.

라이언 일병은 이제 할아버지가 되었다.

아내와 손주들을 데리고 밀러 대위의 무덤 앞에 서서, 보고한다.

“제가 열심히 살았습니다. 어떻게 구해주신 인생인데…

하루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여보, 당신이 말씀을 드려줘.” 부인은 밀러 대위 대신 남편에게 말한다.

“그래요, 당신은 정말 최선을 다해서 사셨어요.”

 

Ryan 일병을 구하라는 명령은 실제가 아니다. 다만, 전쟁에 나간 4형제 중에

한 명만 살아서 돌아온 실화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영화이다.

 

비평가들 중에는 일병 하나를 구하기 위해서 일곱 명의 장병이 희생되는 각본이

虛無孟浪하고 비현실적이라는 악평을 하기도 한다.

 

2.

그럴까? 그것이 架空妄想일까?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두 Ryan 일병을 구하기 위해서 산다.

우리는 모두 Ryan 일병을 구하기 위해서 죽는다.

우리가 그렇게 역사에 빚을 졌기 때문이다.

 

2차 대전에서 희생된 생명이 5,640만 명이다. 그 희생 위에서,

지금 숨쉬는 사람들이 인생을 살고 미래를 가꾼다.

얼굴도 모르는, 작대기 두개, 일병 계급, 하찮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너무 귀한 존재들이다. 5,640만 명이 희생하여, 살려준 인생이고, 열어준 미래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3년1개월 2일 동안 137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은덕을 입지 않고, 지금 이 나라에서 숨쉬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이름이 무엇이든, 계급이 어떻든, 어떻게 생겼든, 무엇을 하든,

귀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때로는 구하기 위해서, 때로는 구해지기 위해서, 역사가 흐른다.

그것이 진리이다.

 

3.

“진리에 속한 사람은 내 목소리를 듣는다.” (요한 18,37)

 

오늘 첫째 독서를 쓴 다니엘과 둘째 독서를 쓴 요한은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역사의 완성을 본다.

현세의 언어가 그들이 듣고 본 것을 담을 수 없기에, 묵시문학이 되는 것이다.

 

“구름을 타고 나타나시고,” “구름을 타고 오시는 분.”

그분은 역사에 희생된 모든 생명을 대신하는 어린 양이시고,

이름조차 없는 과부에게 – 죽은 아들을 살려 돌려주시는 임금이시다.

그래서 죽었던 아들은 살아 돌아와 다시 반지를 끼고, 과부는 하늘의 여왕처럼 귀해진다.

 

그분의 희생이 – 역사의 원리이고, 시간의 미래이고 창조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그걸 깨침이 신앙이다.

그런 신앙의 눈으로 개인의 生老病死와 현세의 興亡盛衰를 초연히 관조하는 것이 평화이고,

그런 평화 속에서 내가 심어진 자리를 은총으로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기도이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그런 평화를 누리지 못하면, 그런 신앙이 없으면,

인생은 迷夢이고, 역사는 盲目이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신 분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들이다.

 

아마 그래서 오늘부터 성서주간이 시작되는 것일까? 읽고 깨치고 기도하라고.

 

오늘이 반포성당 본당의 날이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이 성전을 축성하신 지 42주년 되는 날이다.

이 성전을 지으신 분들이 우리 이름을 알았을까, 우리 얼굴을 알았을까?

그분들의 봉헌과 노고와 사랑이 오늘 우리에게 말한다.

“Earn this, earn it.”

“이 성전이 서있는 하루라도, 이 성전의 구석 하나라도 낭비하지 마라.”

 

오늘이 아마도 이 성전에서 맞는 마지막 본당의 날일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이 성전에서 우리와 함께 공기를 나누어 마시다가

올해 하늘에 드신 분들을 기억하고자 한다.

 

김희순 루치아 님, 이선자 비비안나 님, 안종찬 베드로 님, 강인송 루치아 님, 강승안 프란치스코 님, 김활림 율리아 님, 박병애 데레사 님, 강갑신 안젤로 님, 김종호 신부님의 조모 되시는 이영자 마리아 님, 신광호 베드로 신부님,

권중태 프린치스코 님, 차준성 세자 요한 님, 정성혜 엘레사벳 님,

이순기 안젤라 메리치 님, 송기남 필립보 님, 임영준 야고보 님, 김정숙 안나 님, 그리고 지난 11월 16일이- 이 성당을 지으신, 초대 주임, 박병윤 토마스 신부님의 기일이었다.

그분들이 우리 얼굴을 다 아셨을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알게 모르게, 의도하셨든, 그렇지 않았든,

우리는 그분들의 삶과 죽음에 은덕을 입었다는 사실이다. 하느님 안에서.

 

그분들이 묻혀 더 거룩해진 땅으로 우리가 돌아갈 것이다. 약속된 땅이다.

 

위령성월은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은덕을 낭비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추스리고, 우리 자신과 우리가 구해야 할 이름 모르고 얼굴 모르는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달이 되어야 한다.

 

밀러 대위의 음성인가? 임금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인가?

“내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마라.”

“반드시 살아서 어머니께 돌아가라. 잘 살아라.”

“Earn this, earn 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