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1 연중 29주간 목요일 강론]

1.

가을인데 구반포를 한번 걸어야겠다. 천천히, 걸음걸음, 한 그루, 한 잎.

설악산, 오대산이 아니다. 굳이 구반포이다.

 

둘러보니, 더 줄여야겠다. 쟁일 때가 있고, 풀 때가 있다.

미루는 습성이 있는 저는, 이렇게 심드렁 제 방을 바라만 보다가

마지막 날에 난리를 치르듯 저 짐들을 버릴 것이다.

 

그건 뭐 일도 아니다.

신자석에서 바라보는 이 성전도 아름답지만,

아침 11시쯤, 화창한 햇살에, 이 제단에 서면, 그때마다 마음이 뭉클하다.

벌써 세 해, 그리고 두 달,

이 제대에서 미사를 드린 건, 눈 뜨는 일이었고 철드는 과정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성당이 없다.

이걸 허물어야 한다니. 빈손으로, 혼자.

소명? 무슨 소명? 편히 살아 온 보속이다.

무슨 넋두리인지 반포 사람들만 알 것이다.

 

2.

복음서는 다 비슷한 구성이다.

1부 도입,

2부 갈릴래아에서 선교,

3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

4부 수난과 부활과 승천.

 

요즘 평일에 읽는 루카복음은 유독 3부가 길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 위의 말씀과 행적이 무려 10장에 걸쳐 기록된다.

그 시작이 루카복음 9장 51절인데, 성경에는 그 제목을 이렇게 적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다.”

요즘 우리가 연이어 하나씩 듣는 가르침은

모두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길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제, 그제 들었던 “깨어 있어라, 도둑처럼 올 것이다.”

이런 말씀은 무슨 도덕경이 아니다.

이런 모든 가르침을-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그곳에서 일어날 파스카 성취의 준비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놓고 보면, 오늘 복음도 다 뚫린다.

예수님께서 받아야 할 세례란 그분이 겪으신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고,

분열은 비유가 아니라 그 세례 전후에 일어난 실제 상황이다.

이 구절은 마태오복음에도 나온다.

 

불을 지르러 왔다는 표현은 루카 복음에만 나온다.

그런데, 불을 어디에 지르는 것일까?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다.”

그렇게 여정이 시작하자마자 나오는 루카만의 기록이 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는데, 첫 번째 마을에서부터 배척을 받는다.

그 이유가 이렇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루카 9,53)

 

그때 야고보와 요한의 반응이 무엇인가?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불살라 버릴까요?”

지난 주일, 오른쪽, 왼쪽 타령을 하던 제배데오의 아들 형제, 그들이었다.

철이 없다.

불은 마을에 지르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지른다는 말씀은 세상을 품는 마음과 세상을 이끄는 영혼을 가리킨다.

한 줌 재로 돌아가고, 다시 한 줌 재에서 일어나고

그래야 인간이 파스카에 참여하고, 그래야 우주가 파스카를 입는다.

 

3.

어젯밤, 첫 추위에 감기 기운을 안고,

성전을 바라보며, 흥얼거렸다.

“그래 그래 그래 너무 예쁘다, 새하얀 드레스에 내 딸 모습이.

잘 살아야 한다 행복해야 한다. 애비 소원은 그것뿐이다.” (최백호, 애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