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영감의 회상: 건축가 유희준 비오의 반포성당 방문

추석 연휴 첫날인 9월 18일(토) 반포성당을 설계하신 건축가 유희준 비오님께서 본당을 방문하셨습니다. 전부터 오고 싶어 하셨으나 건강 상태가 여의치 않아 두 차례 미룬 끝에 어렵사리 성사된 자리입니다. 오전 10시 30분 고석준 아우구스티노 주임신부님께서 유교수님을 모시고 성당에 도착하셨습니다. 김옥자 데레사 사모님도 동행하셨습니다. 일찌감치 기다리고 있던 참석자들의 열렬한 박수와 함께 김경숙 글라라님이 환영의 꽃다발을 전달하였습니다. 목례로 감사를 표하신 교수님께서는 깊은 감회에 젖은 채 성당 전경을 찬찬히 바라보셨습니다.

유희준 비오 교수님을 환영하며 본당 교우들을 대표해 김경숙 글라라님이 꽃다발을 드리고 있습니다.
유희준 비오님과 김옥자 데레사님

성전 입장과 동시에 글로리아전례합주단의 환영 연주가 울려 퍼졌습니다. 제대를 향해 천천히 구르는 휠체어 바퀴는 45년의 시간을 거스르며 성전이 처음 설계된 1976년으로 모두를 데려가는 듯했습니다. 강남지역 최초의 성당인 그리스도왕 반포성당을 설계한 40대의 젊은 건축가가 이제는 대한민국 건축계의 태두이자 후학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원로가 되어, 당신이 기도와 영감으로 완성한 ‘하느님 집’에 다시금 침잠하는 가슴 벅찬 순간입니다. 또 현재를 사는 본당 신자들이 유희준 비오 건축가를 매개로 성전 건립이 시작되던 바로 그 시점과 조우하는 역사적인 순간이기도 합니다.

성전 제대 앞에 유희준 비오 교수님을 모시고 행사를 진행하는 모습

우성현 프란치스코 총회장님의 환영 인사로 본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979년 축성된 이래 아름답고 멋진 성전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이 매우 크지만, 주변 환경이 변화하고 성당도 노후화되어 재건축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반포성당의 재건축을 쾌히 동의해 주시고 직접 본당을 방문해 격려해 주심에 깊이 감사드리며, 제2의 반포성전 축성 때도 함께하시길 기원한다.”는 말씀으로 환영사를 마쳤습니다.

우성현 프란치스코 총회장님

교수님께서는 2015년 12월 ‘유희준의 열정’이라는 주제로 개인 미술작품전을 여신 적이 있습니다. 이때 쓰신 ‘열정’이란 글을 박수현 카타리나님이 낭독하였습니다. “건축은 나의 인생이자 평생의 열정 그 자체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도 건축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을는지 모른다. 나는 내 안에서 건축을 발견하고, 그것이 그림으로 변형되어 다양한 형태와 색깔로 나타나는 것을 느낀다. 캔버스 위의 초록색, 청색, 그리고 붉은색은 내 영혼에서 나온 색들이다. 이 색들은 어두움과 대별된다.”

이어 고석준 신부님께서 글 말미에 나오는 T. S. 엘리엇의 시 “East Coker”를 낭송하셨습니다. “오 어둠이여, 어둠이여, 어둠이여! 저마다 모두 다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가? 별과 별 사이의 공간들, 그 텅 빈 공간에서 또 다른 텅 빈 공간 속으로!”

노건축가의 자전적 연극 속 독백 같았던 이 장면은 고석준 신부님께서 기획 연출하셨는데, 아마도 건축과 미술을 향한 일생의 열정에 존경을 바치는 신부님 나름의 애틋한 헌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희준 교수님의 글을 낭독하는 박수현 카타리나님과 엘리엇의 시를 낭송하는 고석준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유희준 교수님께서는 “성대한 자리에 초대해 주시고 옛 생각을 떠오르게 해 주셔서 감사하며, 옛 모습 그대로가 너무 아름답고 감동적”이라고 하시면서, “초대해 주셔서 재삼 감사하고 특히 신부님께 감사드린다.”는 말씀으로 답례를 하셨습니다.

잠깐 마스크를 내리고 말씀하시는 모습

건축가 유희준 비오님을 본당에 초청한 이유 중 하나는 성당 설계에 얽힌, 설계 당사자가 아니면 누구도 말해 줄 수 없는, 귀한 말씀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반포성당을 설계하시게 된 계기를 묻는 안우성 프란치스코 건축사님의 질문에 대해 “미국 설계 사무실에 있다 귀국한 후 반포성당을 짓는다는 말을 듣고 ‘한국에서 보기 드문 참신한 성당으로 설계해야겠다.’는 맘을 먹었고, 반포성당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성당을 좋아해 주신 교우들의 사랑에 기쁘고 고마웠다.”는 당시 심정을 덧붙이셨습니다. 아울러 새 성전 건립에 대해서는 “하느님이 내려주신 반포성당의 터전을 최대한 잘 살려서 아름다운 성당이 나오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해주기 바란다.”는 당부의 말씀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안우성 프란치스코 건축사님

이날 행사에는 새 성전의 설계를 맡게 된 공간그룹 이상림 알렉산더 대표님도 함께하셨는데, 이대표님은 유교수님과 사제지간으로 오랫동안 깊은 신뢰와 따뜻한 친교를 나눠온 사이이기도 합니다. 유희준 교수님께서는 이상림 대표님의 손을 꼭 잡고 축복하며 “잘 부탁한다.”고 하시면서 “이상림 회장님은 평소에 건축계에서 최고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주 훌륭하신 분이시며, 그분이 설계를 하신다는 말을 듣고 너무너무 기뻤다.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여러 차례 강조하셨습니다.

왼쪽의 이상림 공간그룹 대표님. “이상림 회장님을 최고로 존경한다.”는 말씀을 신부님께서 “거꾸로 된 것 같다.”고 받으시면서 장내에 큰 웃음이 일었습니다.

지금 성당에서는 과거의 모든 건축 기록과 성미술품 등을 총정리한 책 발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집필을 담당하고 계신 김종헌 이시도르 교수님의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성전을 육각형의 평면으로 지은 의도와 당시 한국에선 보기 드문 타일을 재료로 쓰신 이유를 여쭸는데, “하느님이 주신 땅에,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고 즐기고 존경할 수 있는 그런 터전에 ‘너의 최선을 다해 설계를 하라.’는 임무를 받아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이 원하시는대로 손만 움직였다 뿐인데 지금 봐도 아름다운 게 너무 고맙고 하느님께 감사한다.”는 말씀으로 대답을 대신하셨습니다.

김종헌 이시도르 교수님

간단한 질의응답을 마친 후 주임신부님께서 유희준 교수님과 사모님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며 강복을 주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언제나 하느님의 뜻만을 생각하는 유희준 교수님께 건강 주시고 또 사모님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시고 모든 교우들에게 신앙의 표양이 되게 하소서. 또한 유희준 교수님의 뜻을 받들어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의 뜻만을 생각하며 당신께 영광을 드리는 훌륭한 성전을 지어서 이곳에서 기도하다가 영원한 하늘나라에 모두 함께 모이게 하소서. 이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교수님의 맞잡은 손을 보며 하느님께 대한 공경과 겸손을 배웁니다.

이로써 공식 행사를 마무리하려는 순간, 김옥자 데레사 사모님께서 교수님의 병자성사를 요청하셨습니다. 신부님들께서 황급히 준비를 하시는 동안 내외분은 제대 앞에서 기념 촬영도 하시고 조용히 성전도 둘러 보셨습니다. 마주치는 사람들에게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건네기도 하셨습니다.

병자성사를 드리고 계신 고석준 아우구스티노 주임신부님과 김종호 프란치스코 보좌신부님
옷에 성수가 반짝입니다. 영원히 마르지 않는 은총의 샘물로서 언제나 교수님을 지켜 드리기를 기도합니다.

병자성사 예식을 마치면서 또 한 번 강복을 받은 다음, 모든 참석자들은 마당으로 이동해 단체로 기념 촬영을 하였습니다. 화창한 날씨 덕에 시종 차분하면서도 밝은 분위기 가운데 즐겁게 촬영을 마치고, 유희준 비오 교수님과 김옥자 데레사 사모님께서는 작별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성당에서 마련한 차편으로 귀가하셨습니다.

본당 사제, 공간그룹 이상림 알렉산더 대표, 성전건립위원회, 사목협의회와 글로리아전례합주단
유희준 비오 교수님 내외분과 새 성전 설계를 맡은 공간그룹 이상림 알렉산더 대표
유교수님 내외분, 이상림 알렉산더 공간그룹 대표(오른쪽 두 번째)와 성전건립위원
유교수님 내외분, 총회장과 사목위원

비록 한 시간 남짓한 짧은 만남이었지만 건축가 유희준 비오님의 반포성당 방문은 여러 측면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특이한 육각형의 평면 구조안에서 위로 높이 솟은 성전은 화려한 빛의 산란을 더욱 신비롭게 하면서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신심을 북돋우고 신자들로 하여금 본당에 강한 애착을 갖게 해 왔습니다. 건축가의 애초 기대대로 과연 한국에서 보기 드문 참신한 성당으로서 늘 교우들의 자부심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경의와 감사를 설계자에게 최초로 전한, 본당 역사상 전무한 자리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또한 성당 재건축을 목전에 두고 기존 건축 기록을 책으로 발간하려는 상황에서, 성전 건립 초기를 돌아보고 그 교훈을 익혀 새 시대를 준비하는 학습의 장으로서도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어제의 반포가 없었다면 오늘은 물론 내일의 희망을 기약할 수 없는 것처럼, 새 성전 건축을 위해서도 현 성전의 시초를 다시 더듬어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지혜를 쌓는 게 중요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유희준 교수님의 내방은 본당으로서는 꼭 필요한 요청 사항이었습니다.

끝으로 유희준 비오와 이상림 알렉산더 두 건축가가 반포성당의 신, 구 설계자로 한날한시에 만나 축복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존경과 사랑을 전하며 새 성전 설계에 최선을 다해 줄 것을 당부하고 응원하는 축복 장면은 가슴 뭉클한 광경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집’을 먼저 봉헌한 스승이 이제는 그 집이 시대적 소임을 다했음을 인정하고 제자에게 새 집 설계의 소명을 기쁘게 물려주는 숭고하고 거룩한 축복! 연로하고 편찮으심에도 불구하고 본당에 직접 오셔서 그 축복의 현장을 몸소 보여주신 유희준 비오님! 2021년 9월 18일은 반포성당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날임을 교우들은 두고두고 기억할 것입니다. 건축가 유희준 비오님께 진정한 존경과 감사를 올립니다.

 

[유희준 비오 건축가] “하느님의 뜻 반포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