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2 연중 25주간 수요일 강론 – 떠나야 머무는 곳]

사도가 몇 명인가? 열두 사도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도는 열두 명인가?

꼭 열두 명만이 아니다.

열둘이란 숫자는 완전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사도가 몇 명인가 보다, 사도란 누구인가, 이걸 따져야 한다.

사도란- 오늘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보내시려고 부르는 제자들이다.

 

누리집에 보면, 우리 본당의 카리타스회가 어디를 다녀왔는지 기사가 나와 있다.

산동네 금호동 선교 본당.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라파엘 성당…

우리 카리타스회는 그저 여기 앉아서 돈을 걷어 돈을 보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보내지는 것은 돈뿐이다. 카리타스회는 자신들이 보내진다.

“빵도 돈도 지니지 마라.” (루카 9,3)

네가 바로 빵이요, 돈이요, 교회의 힘이요, 예수님의 권한이다. 네가 사도이다.

곧 그런 말씀이다.

 

그 힘과 권한과 함께하려면, 계속 떠나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녀야 한다.

 

처음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마을에 붙잡고 싶어 했다.

그때, 예수님은 무어라 하셨나?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마르코의 기록이다. (마르 1, 38)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루카의 기록이다. (루카 4, 43)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다른 고을을 찾아 가려면, 머물던 고을을 떠나야 한다.

간단한데 쉽지 않다. 이사가 그렇다. 뒤집고 털어내고 버려야 한다.

내 고을이요 내 것이요, 나만, 여기 살 수 있다면 이사를 못 간다.

그런 생각의 샘을 막아야, 새 날을 맞는다.

 

비단 반포 고을뿐이랴? 머물면 먼지가 쌓인다.

모임이 정착되면 내 자리이고, 일이 익숙해지면 내 것일까?

교회를 위해서 그런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걸 자기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이미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다른 고을로, 다른 일로, 떠나가는 모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머무르는 것 좋다. 열심히 머무르는 것은 더 좋다.

다만, 떠날 때까지 만이다.

떠날 때를 알아야 편안히 머무를 수 있다. 머무름이란 떠나는 시작이다.

떠날 때를 모르면, “먼지를 털어 버려”야 한다.

한 두 사람만 먼지를 뒤집어쓰는 일은 없다.

너, 나 할 것 없다. 나부터, 우리 모두이다.

언제까지? 이승을 떠날 때까지. 그게 이승에 머무는 이유이다.

 

내가 전에 이 고을에서 뭐 했다? 그런 말씀하지 마라. 떠나지 못한 것이다.

내가 이 일을 언제부터 했다? 그런 말씀하지 마라. 떠나지 못한 것이다.

일을 시작하며 그 일을 물려줄 사람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머무름이 떠남이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다.

 

누가 사도라고?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루카 4, 43)

사도란 예수님의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성탄은 승천의 시작이었다.

주님께서 떠나지 않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머무신다면,

그건 교회가 아니라 왕국이다.

우리가 영원히 머물 곳은 하늘나라이지, 이 세상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울리지 않는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요한 19, 36)

 

그래서,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주었다.” (루카 9,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