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8 연중 24주간 토요일 강론 – 가을의 이유]

추석이라는 게 신기하다. 요즘 선선한 바람이 좋다. 바람이 추석을 안다.

지난 여름 무척 덥더니, 이제 가을 문턱이다.

가을은 맑아도 좋고, 비가 내려도 좋다.

 

이스라엘에서는 아직 한 달 더 있어야 한다. 아직 땡볕이 세고, 공기가 메마르다.

그동안 다 말라버려서, 밭은 길이 되었고, 송장색 가시가 덤불이다.

10월 말이 되어야 비로소, 대기에- 습기의 아늑한 기억이 돌아온다.

그 민감한 후각이- 11월에 시작해서 3월까지 이어지는 우기를 예고하면,

세상이 깨어난다.

길도 밭이 되고, 바위 틈에 싹이 나고, 풀들에 힘이 차고, 나무가 푸르러진다.

길가, 바위, 가시덤불, 좋은 땅… 이런 표현들이 그래서 나왔다.

 

우리는 먼저 밭을 갈고나서 씨를 심는데,

이스라엘에서는 먼저 씨를 뿌리고 밭을 간다.

모르긴 몰라도,

[씨를 뿌려서] 키우는 식물과 [씨를 심어서] 키우는 식물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거다. 같은 생명이라도 풀과 나무가 도대체 몇가지인가?

씨도 그만큼 각각 제 나름이다.

 

하느님을 전하면 모두 복음이다.

오늘 사도 바오로는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 앞에 서서 제1독서를 시작한다.

만물 안에서 하느님을 보면, 만물이 모두 복음인데,

4복음서만 복음이라는 생각이-

다른 생명을 키우지 못하고, 밭이랑을 길가로 만들고 풀 대신 가시를 키운다.

 

목자들이 성탄 밤에 마구간을 찾아 왔을 때 성모님은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셨다. (루카 2,20)

 

예수님이 나자렛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내실 때,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셨다. (루카 2,51)

 

씨를 흩뿌려도 성모님은 그걸 하나, 하나, 귀하게 마음속에 심으신다.

 

아브라함은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어귀에 앉아 있다가, 나그네 세 분을 대접하였는데, 알고 보니, 하느님이셨다. (창세 18, 1)

 

그러고 보면, 우리는 어제도, 그제도, 지난 여름도,

우리에게 뿌려진 귀한 씨를 길가에, 가시덤불 속으로 버려 버렸는지 모른다.

 

찾아온 목동들, 그저 자라는 아이들, 한창 더운 대낮에 옷깃을 스치는 사람들…

 

태풍으로 제주에 비가 많이 내리길래, 거기 있는 친구가 부러워서 전화를 했더니, 그는 비 내리지 않는 곳에 있는 제가 부러워서 전화를 하려던 참이었다고 한다.

일없이 노는 친구는 저를 부러워하고,

저는 말년운이 나빠서 일이 많다고 툴툴거린다.

이리 내치고 저리 내치고, 남을 부러워하고 불평하다가

내게 뿌려진 씨를 심지 못한다.

 

가을에는- 맑아도 좋고, 비가 내려도 좋다.

높은 하늘은 사람을 푸르게 하고, 단풍 잎 빗물은 사람을 적신다.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라고 가을이다.

 

그래서 복음이 이렇게 끝난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루카 8,15)

 

바람은 추석을 알고,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불어 주는데,

올 추석 상에 우리는 무슨 열매를 놓으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