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대축일 교중미사 강론 윤웅렬 하상바오로 신부]

2021년 4월 4일 주님부활대축일 (사도 10,34ㄱ.37ㄴ-43; 시편 118; 콜로 3,1-4; 요한 20,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일 년에 두 번, 명절 같은 분위기를 느끼는 날이 있죠. 12월 25일, 주님성탄대축일과 바로 오늘, 주님부활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라며 인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뜻인 줄 알고 인사하고 있나요? 단순히 좋은 날이어서 그렇게 인사할까요? 가브리엘 천사가,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에 살던 마리아에게 인사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그때 마리아는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죠. 그렇기에 오늘 우리도, ‘부활을 축하합니다.’ 하는 이 좋은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곰곰이 생각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 안에서는, 부활대축일을 포함한, 지난 성삼일의 전례가 일 년 중 가장 중요하고 또 거룩한 사건들입니다. 주님의 만찬 미사는, 우리에게 성체성사의 사랑을 ‘기억하고, 행하도록’ 초대합니다. 그리고 주님수난예식을 통해, 우리가 매일 바라보는 이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저 위에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무엇이죠?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베풀어주신,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어제, 그 거룩한 밤에 거행된, 부활성야 미사로부터, 오늘의 이 주님부활대축일 낮미사를 통해, 우리는 성체성사와 십자가를, 참으로 살아가고 체험하는, 이 새로운 생명에로 이끌어집니다. 그렇기에 바오로 사도께서도, 코린토 1서에서 이렇게 선포하시는 것이죠.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우리가 사순 시기 때에는 잠깐 참았다가, 부활이 시작되자마자 터트리는 환호성이 있는데, 무엇이지요? 알렐루야. 이 알렐루야가 무슨 뜻일까요? 히브리어 중에, ‘힐렐’이란 원형을 가진 동사가 있어요. ‘찬미하다, 찬양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동사를 명령법으로 바꾸면, 그러니까, ‘너는 찬양하여라!’로 변화시키면, 그 발음이 ‘할렐’입니다. 이것을 ‘너희는 찬양하여라!’라고, 복수형으로 변화시키면, ‘할렐루’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찬양하라고요? ‘야’. ‘야’는 ‘야훼’와 같은 뜻입니다. ‘야훼를 찬양하여라!’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죠. 그래서 성경에, ‘야훼’라고 적어 놓은 부분은, 항상, 써 놓은 그대로 읽지 않고, ‘나의 주님’하고 바꾸어 읽었습니다. 그 대신, ‘야훼’의 의미를 담은 ‘야’라는 단어를, 다른 단어들 안에 붙여서 썼어요.

 

대표적으로, ‘이사야’. 히브리어로 ‘예샤야후’ ‘예샤’ 구원하신다, ‘야후’ 주님께서. 그래서, ‘이사야’라는 그 예언자의 이름은,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 것이죠. 다시 돌아와서, ‘할렐루-야’ 무슨 뜻이라고요, ‘너희는 찬양하여라, 주님을!’ 시편 150편을 보면, 1절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엘’. ‘할렐루-야’ ‘너희는 주님을 찬양하여라’. 곧 이어서, ‘할렐루-엘’ ‘너희는 하느님을 찬양하여라’. ‘엘’은 하느님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 첫 번째 환호인 ‘할렐루-야’가 점차로 고유한 표현이 되었어요. 그리스어 성경에서, 이것을 ‘알렐루야’라고 음가 그대로 번역했습니다. 왜냐하면, ‘ㅎ’ 발음이 지역에 따라 생략되기도 하였거든요. 이 그리스어의 ‘알렐루야’가 라틴어 ‘알렐루야’로 그대로 번역되었고, 라틴어를 기본 언어로 사용한 우리 교회의 전례 안에서, ‘알렐루야’라고 계속해서 부르고 있는 것이죠.

 

개신교 신자분들이 주로 ‘할렐루야’라고 환호하지요. 틀린 것 아닙니다. 히브리어 발음 그대로 하는 거예요. 반면에 우리는 거룩한 전례 전통 안에서 주로 ‘알렐루야’라고 사용하고 있어요. 성경에서는 ‘할렐루야’라고 번역하고요. 발음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그 뜻입니다. ‘너희는 주님을 찬양하여라!’

 

이 부활시기에, ‘알렐루야’ 이 환호가 왜 터져 나오는 것인가요? 부활초를 보십시오. 올해의 부활초입니다. 어젯밤, 부활 성야 미사 때에, 우리 주임신부님께서 빛의 예식을 하면서 축성한 거룩한 초입니다. 초 한 가운데에는 십자가가 그려져 있고, 그 위에는 ‘알파’, 시작을 뜻하는 그리스어의 첫 글자가, 아래에는 ‘오메가’, 마침을 뜻하는 그리스어의 마지막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상징하는 우리의 구원이, 시작에서 완성까지 이어지리라는 뜻입니다. 그 놀라운 신비가 바로, 2021년,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이 부활초가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이 커다란 부활초는, 불기둥과 같습니다. 불기둥 하면 무엇이 떠오르죠? 이집트 탈출의 사건이 떠오릅니다. 노예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영도자 모세가 이끌어냅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할까요. 뒤에는 이집트 병사들이 쫓아오고, 앞에는 황량한 광야가 펼쳐져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까요. 바로, 주님의 불기둥이 이끄는 곳으로. 낮에는 구름 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방향을 알지 못하는 그 백성들을 비추고, 인도합니다.

 

이 부활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워주신, 주님의 불기둥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의 현실 안에서,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를 인도할, 이 불기둥을 지금, 다시 바라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불빛으로 나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니 이 환호가 터져나올 밖에요. ‘주님을 찬양합시다.’ ‘알렐루야!’ 그리고 주님께서, 나와 마찬가지로, 여러분 또한 빛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렇기에 진심으로 인사할 수밖에요. ‘부활을 축하합니다.’ 신앙의 눈으로, 우리는 각자, 각자 안에 심어진, 이 불기둥을 바라봅니다. 성체성사와, 십자가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나를 이끄시는 이 불기둥. 이 불빛에 따라 살아갈 수 있다면, 나는 더 이상 방황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새로운 생명입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을 들으면서, 조금 의아했던 부분이 없으셨나요? 마지막 구절을 다시 읽어볼게요.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일 년 중 가장 절정에 해당하는 특별한 날인데, 말씀의 결론이 뭐 이럽니까. 부활하신 예수님, 정작 등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그 무지, 몰이해, 아직 깨닫지 못한, 그들의 부족한 모습을 드러내며, 말씀이 끝나버렸어요. 뭐 이럽니까.

 

구약 성경의 가장 귀한 다섯 책, 모세 오경,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 오경의 마지막 부분을 한 번 기억해볼까요. 주님께서는 모세를 예리코 맞은편에 있는 느보 산 꼭대기에 데리고 가셔서, 당신께서 약속하신 거룩한 땅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저것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너희 후손에게 저 땅을 주겠다.’ 하고 맹세한 땅이다. 이렇게 네 눈으로 저 땅을 바라보게는 해 주지만, 네가 그곳으로 건너가지는 못한다.” 뭔가요 이게. 모세가 어떤 사람이죠. 백성들이 주님을 거슬러 우상숭배하고, 악한 짓을 벌입니다. 주님은 진노하시어 모세에게 말합니다. ‘안되겠다. 이 백성은, 틀렸다. 이제 그들은 내치고, 나에게 충실한 너만 축복해주마.’ 그러면 모세는 말합니다. ‘주님, 저들 모두, 당신 백성 아닙니까. 내치실 거면, 저도 같이 내치십시오. 그러지 않으실 거면, 용서해주세요.’ 항상 반복이에요. 백성들에게는 가서 ‘뭐하는 겁니까, 여러분. 정신 안 차립니까’ 하고 꾸짖으면서도, 주님께 가서는 ‘부디 용서해주세요, 당신의 백성 아닙니까.’

 

그런데, 이 위대한 예언자가,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요.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 하면서도, 정작 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것이, 구약의 가장 귀중한, 오경의 결말입니다. 왜 이런 결말일까요. 약속의 땅이 무엇이기에.

 

예수님이 오셔서 그 첫 번째 약속의 결말을 지어주셨어요. ‘그 약속의 땅은, 사람이 밟고 서는 흙이 아니라, 구역이 아니라, 하느님의 다스림 그 자체이다. 사랑이신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백성이고, 하느님의 백성들이 모여 함께 서 있는 그곳이, 곧 하느님 나라이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그런데, 그 복음을 선포하시던 분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그 반전을 기다렸는데, 우리는 여전히, 빈 무덤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속 시원한 결말은 어디에 있나요. 우리가 바라는 그 해피 엔딩은, 어디에 있나요.

 

바로 우리 안에 있습니다. 내 안에 있습니다. 내 안에, 주님께서 심어주신 이 불기둥이 활활 타오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하느님의 다스림이, 내 안에 있음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 단 두 가지만 기억해도 충분합니다. 성체성사와 십자가. 성체성사, 주님의 그 끝까지 다하는 사랑. 십자가, 거저 베풀어주신 그분의 구원. 이 두 가지를 진심으로 깨닫고 체험할 수 있다면, 이미, 불기둥이 타오르는 것입니다. 삶의 방향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미,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고 있구나. 그 사랑이, 나를 사랑하도록 재촉하는 구나.’

 

이 감동적인 체험이, 우리 각자가 지닌 나약함에 발목 잡히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여전히 생긴 모습 그대로 살아갈 거예요. 체험했다고, 갑자기 사람이 180도 바뀌지 않아요. 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씩 변화해갑니다. 불기둥이 있기 때문입니다. 느보 산 꼭대기에서, 그리고, 빈 무덤 앞에서 이상하게 끝나버린 말씀들. 하지만, 모세와 예수님은 모두 우리에게, 결말은 책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에 쓰여 있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이는, 참으로, 새로운 삶, 새로운 생명으로의 초대입니다. 그 힘을 하느님께서 주십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 안에 심어진, 주님의 불기둥을 바라보며 인사합니다. ‘사랑하는 교우님들, 진심으로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매년 반복되는 이 부활절. 마치 생일처럼, 우리를 새 생명으로 초대하며, 축복하는 시간입니다. 참된 부활은, 완성의 때의 그 희망 안에 자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참된 부활을, 지금 여기서, 미리 맛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대해주신, 성체성사와 십자가의 삶이 내 안에 자리한다면, 우리는, 바로 그 순간에서부터, 새로운 생명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체성사와 십자가가 이끄는 부활의 삶은, 단순히 희생하고, 양보하고, 참고, 견디고, 그런 것이 아니에요. 부활의 삶은, 그 무엇보다 두려움 없는 기쁨 가득한 삶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가득히 임하여, 그 사랑으로 재촉 받는 삶입니다. 그렇기에 다시금 인사드립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여러분, 진심으로 주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