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업 시복시성 기도 주일 강론]

강론-210228-사순2주일 나해-반포성당 강론 (마르코 9,2-10)

최양업 신부님 시복 시성을 위한 기도의 날-

 

1.

오늘 주보를 벌써 다 읽으셨겠죠? 오늘이 어떤 날인가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주보가 차차 줄어들다가 사라질 것이고, 또 꼭 그래야 합니다.

그래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게 다 엄청난 양의 종이이고, 종이는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안방에서 컴퓨터를 켜면 누리집에서 다 읽을 수 있고,

지하철에서도 손전화에 다 뜨는 소식을 굳이 인쇄해서, 배달하고, 접고, 나누어 주고, 가져가고, 남는 걸 치우고, 버려야 합니까?

 

세상은 점점 변하고, 이제 머지않아

우리 성당도, 신앙생활도 누리집 중심으로 변하리라 봅니다.

 

이 누리집이란 말이 재미있습니다.

Homepage 라는 말을 우리 말로 옮긴 것인데,

그걸 직역하면 [ 갈피]정도 될 텐데, 그걸 의역해서 [누리집]이라고 했습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누리집에 들어가면 온 누리를 다 다닐 수 있고,

누리 어느 곳에서도, 곧 바로, 우리 집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대교구에도 누리집이 있고, 이걸 통해서 모든 본당과 정보를 연결하는 운영체계가 있는데, 그걸 [양업 시스템]이라고 합니다.

[양업]이란 한국의 두 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님의 함자입니다.

 

이게 정말 적절한 명칭입니다. 왜냐하면 최양업 신부님이야 말로,

전국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모든 교우촌들을 몸소 걸어 다니시며 연결하시던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표현이 있는데,

최양업 신부님의 생애를 따라가 보면 그런 말이 절로 나올 수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사제 수품 1년하고 30일만에 스물 다섯의 나이에 순교하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과 함께 신학생이 되신 분이 [최양업]과 [최방제]이신데,

세 분 모두, 1821년, 뱀 띠 생, 동갑이지만, (최방제는 한 살 많을 지?)

하느님께서는 오묘한 방법으로 이 분들을 각각 달리 쓰셨습니다.

 

한양에서 라틴어를 배우다가, 1년만에 마카오에 도착한 지, 불과 다섯 달 만에

최방제 신학생은 병을 얻어 일찍 세상을 떠납니다. 그때 신학교 신부의 편지를 보면, 김대건도 병치레를 많이 해서, 늘 배가 아프고, 요통과 두통이 있었지만,

최양업은 아주 튼튼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최양업은 뛰어난 판단력을 칭찬받는데,

김대건은 행동이 주의 깊지 못하다는 걱정을 듣습니다.

아마 좀 덤벙대는 성격이었는지, 그리고 무모할 정도로 용감해서,

하느님께서는 그를 제일 먼저 조선에 들어가 곧바로 순교하는 사제로 쓰셨고,

최양업은 그보다 4년이나 늦게 신부가 되어서 겨우 조선에 들어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모두 스물한통의 편지를 남겼는데, 그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제가 순명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하였더라면, 저는 벌써 조선에 들어가 있거나, 아니면 저 세상에서, 순교자들 곁에 있을 것입니다.” (1849년 5월 12일).

 

공부는 최양업 신부님이 더 잘했다고 합니다.

프랑스 배를 타고 통역을 했던 김대건 신부님의 학식과 외국어에 조정이 놀라고 아까워했는데, 최양업은, 사전도 없이, 프랑스 말로 된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해서 교황청에 보냈습니다.

 

바로 이 번역이- 80년 후에,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순교자들이 시복되는 데에 결정적인 자료가 됩니다.

 

무려 여섯 번의 시도 끝에, 고국을 떠난 지 무려 14년 만에, 조선에 들어오고 보니, 유일한 방인 신부을 기다린 것은 전라 좌우도, 경상 좌우도, 충청도, 5천리에 펴져있는 교우 3,815명이었습니다. 첩첩 산골을, 여섯 달 동안, 걸어서 찾아가 직접 만난 교우만 그렇다는 것입니다.

 

입국 열 달 만에, 일곱 째 편지에 쓰셨습니다. (1850년 10월 1일).

“신자들은 거의 모두- 외교인들이 경작할 수 없는 험악한 산속에서

외교인들과 뚝 떨어져서 살고 있습니다. … 세속의 모든 관계를 끊고 산속으로 들어가 담배와 조를 심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1년 후의 편지를 보면 벌써 신자들이 늘어났습니다. (1851년 10월 15일). “제가 담당하는 교우촌은 자그만치 127곳이나 되고, 세례명을 가진 이들을 다 합하면, 5,936명이나 됩니다. 한 공소에 고해자가 마흔 명 내지 쉰 명이 있어도 그들 모두에게 하루 안에 고해성사를 다 주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고해자가 두 세 명밖에 없는 공소에서도, 다음날 미사를 봉헌하고, 신자들에게 성체를 영해 주어야 하기에 하루를 묵어야 합니다. 저는 외교인들 모르게 밤에만 교우촌에 도착해야 하고, 하루 안에 모든 일을 마치고, 다음 날 새벽, 동이 트기 전에 그곳을 떠나야 합니다.”

 

4.

다행히 공식적이고 대대적인 박해는 없었던 철종 임금 때였지만

이 시기에도 천주학을 믿는 것은 곧 죽음이었고 멸문지화였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신분을 감추느라 상복을 입고 다니셨지만, 상복 속에서 늘 자신의 죽음을 사셨습니다.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해서 정리하고, 교리책을 번역해서 한글로 편찬하셨고, 글을 읽지 못하는 신자들이 늘어나자, 교리를 이해하기 쉽고 외우기 쉽게- 언문으로 천주가사를 지으셨지만, 그건 또한 자신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어화 

벗님네야 우리본향 찾아가세

동서남북 사해팔방 어느곳이 본향인고

이러틋한 풍진세계 편히살곳 아니로다

인간영복 다얻어도 죽어지면 허사되고

세상고난 다받아도 죽고나면 그만이라

 

어화 

벗님네야 우리고향 가사이다

가기야 가려니와 그냥가기 어렵도다

오주예수 표를받고 다윗성왕 본을받아

밤낮으로 싸우다가 달없는때 만나거든

좁은길을 가다보면 천당문이 거기로다. (중간 생략과 편집)

 

좁은 길로만 다니기 11년 6개월, 산길로만 걸어서 대략 23,000km,

진이 다 빠진 최신부님은- 죽음을 예견한 마지막 편지를 남기십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 계속 추적하는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선교지를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 (열아홉 번째 서간, 1860년 9월 3일).

 

그리고 아홉 달 후에, 배론 신학교 뒷산에 묻히실 때, 연세가 마흔이셨습니다.

 

5.

당시 최신부님의 부음을 보고한 페롱 신부님은 그의 죽음을 두고 조선 교회 전체의 초상이라고 썼습니다.

 

그것 뿐이었을까? 오늘 후손들의 교회를 보면, 우리는 최양업 신부님의 부활을 내다볼 수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무엇을 보셨을까?

역사는 현재에서 과거를 돌이켜보지만, 신앙은 현재에서 미래를 내다봅니다.

 

최신부님께서 교우들을 찾아, 높은 산에 오르시기 한번 두 번이었습니까?

높은 산에 오르시자, 예수님의 모습이 새하얗게 빛났습니다.

 

최신부님께서 다른 교우들을 찾아, 산을 내려오시기 한번 두 번이었습니까?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수도 없이 되새기며, 그렇게 온누리를 내 처럼 다니셨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최양업 신부님의 시복 시성을 위해 기도한다면,

그분을 회상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도 미래를 내다보아야 합니다.

 

머지않아 종이에 인쇄한 주보는 사라질 것이고, 또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이제 교회는 환경을 박해하면 아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산에 올라가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예수님을 뵙고자 한다면, 산에서 내려갈 때, 우리가 이 시대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서로 물어봐야 합니다.

 

짧게는, 새로 지어질 반포성당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불편해서도 아니고 비좁아서도 아닙니다. 3~4년 후, 반포의 전혀 새로운 지형에서,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으로 교회의 사명을 다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길게는, 온 누리가 하느님 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아야 한다.

그것이 요한이 본 묵시록의 장면이고, 우리도 그걸 보기위해 창조되어 세상에 왔기 때문입니다.

 

최방제 신학생, 김대건 신부님, 최양업 신부님, 세 분의 노래가 들리지 않습니까?

어화 

벗님네야 우리 본향 찾아 가세.

좁은 길을 가다 보면 천당 문이 거기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