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를 다시 시작하며]

210118-신자들과 함께 하는 미사를 다시 시작하며

 

용은 날개가 없지만 난다… (중략)

날개도 없이 날게 하는 힘은 개천에 있다.

개천은 뿌리치고 가버린 용이 섭섭하다? 사무치게 그립다?

에이, 개천은 아무 생각이 없어, 개천은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을 뿐이야.

 

6시20분이라고 했으니까 이제 곧 최정례 시인의 발인이 시작될 것이다.

이렇게도 시가 되는구나 싶은 산문시를 쓰시고 66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시인이 떠나도, 세상은 “떠나나?” 하고 말 것이다.

개천은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을 뿐이야.

 

미사를 다시 시작하면서, 별 감흥이 없다.

두번째라서 그런지, 한 살 더 먹어서 그런지,

다시 시작하기를 처음 할 때는- 눈물을 누르지 못 했었는데, 이번엔 그저 그렇다.

 

미사를 함께 하지 못하는 동안, 예수님은 섭섭하다? 사무치게 그립다?

그분은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을 뿐이다.

 

기도한다고 억지로 단식할 필요도 없다.

기도하다 보면 저절로 배부른 게 싫어지고 나도 모르게 단식하게 된다.

단식의 동기를 안에서 찾고, 저절로 음식을 끊고 싶게 되도록 하는 것이

새 가르침이요, 신약의 시작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미사를 하루 앞당겨 어제부터 시작했었으면 좋았었겠다 하는 아쉬움은 있다.

어제가 연중 2주일이었기 때문이다.

어제 복음이 “와서 보아라”였다.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영어로 stay이다. 그냥 같이 있는 것이다.

그저 그냥 함께 있고 나서, 그들은 메시아를 만났다고 했다.

그분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다.

Immanuel이다. 함께 계셔서 구원하시는 분이다.

 

미사는 그걸 일깨워 주는 것이지,

그분이 우리와 비로소 함께 하도록 미사가 만드는 것은 아니다.

 

미사를 하는 것은 –

미사가 있든 없든, 미사의 뜻을 깨치기 위해서이다.

뜻 모르고, 뜻없이 바치는 미사는 기복신앙으로 흐르기 쉽다.

 

미사를 왜 미사라고 하는가? 어원은 라틴어 mittere, 곧 파견이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어떻게 하자는 것이다.

“미사가 끝났으니, 평화로이 가십시오.”

미사가 있든 없든, 메시아와 함께 있으면서, 임마누엘 안에서, 평화를 누리십시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미사가 있든 없든, 이웃에게 전해야 한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오.” 예수님과 묵고 난 제자의 첫 마디였다.

어제 요한복음은 그렇게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다고 전한다.

우리도 베드로를 찾아야 한다.

 

미사에서 파견 받은 임무를 얼만큼 수행했는가?

성전에서 미사를 다시 시작하며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임무를 부여 받지 못하고, 파견 받지 못하는 미사라면, 왜 다시 하려고 하는가?

 

성당 문이 닫혔을 때, 코로나로 모일 수 없을 때,

우리는 미사를 하지 못하여 힘들다고 했다.

왜 미사를 하는데? 개천은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을 뿐이야.

 

성당 문이 닫혔을 때, 코로나로 모일 수 없을 때, 그렇게 지난 한 해를 보내면서, 정작 힘들었던 것은 미사에 참례하지 못하여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웃과 세상에, 전교할 수 없던 것이다.

예비자를 모을 수 없었고 견진성사를 받지 못하지 않았는가?

 

다시 미사를 시작한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자. 이 미사가 새해, 교우들과 하는 첫 미사이다.

 

용은 날개가 없지만 난다. 날개도 없이 날게 하는 힘은 개천에 있다.

그래서 미사를 다시 하는 것이다.

늘 그대로 뒤척이며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날게 하는 힘을 주시어

메시아를 전하기 위해서,

파견을 수행하고, 미사를 완성하기 위해서.

 

최정례 시인은 오늘 새 삶을 시작하고, 우리는 오늘 새 미사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