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반포성당 교우들께] 반포성당 교우들께 드리는 말씀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요한 14, 27)

 

교우들께 평화를 빕니다.

학생들의 등교가 다시 일주일 늦추어 졌습니다.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날 지, 얼마나 오래 갈 지, 마음이 산란해지고 겁이 납니다.

 

최후의 만찬은 제자들에게 마음 산란하고 겁나는 자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꾸 제자들을 두고 어디로 가신다고 하시고, 실제로 세상의 우두머리가 그들에게 다가와 수난이 시작되려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당신의 평화를 주십니다. 한문으로 평화는 고루 平자에 화할 和자인데, 화할 和자는 벼 禾변에 입 口자가 붙은 말입니다. 벼를 털어서 고루 쌀을 나누어 먹는 것이 평화이니 농사와 평화는 한 줄에 놓여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을 재현하는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우리는 땅을 일구어 얻은 빵과 포도를 가꾸어 얻은 술을 하느님께 드리고 그리스도의 피를 받아 모십니다. 그래서 농사와 성찬의 의미도 같은 줄에 놓여 있습니다.

 

만들어서 파는 밥을 사서 혼자 먹는 사람이 많은 혼밥시대에 평화는 마치 자판기에서 떨어져서 포장을 뜯어먹는 음식처럼 여겨집니다. 혼술시대에 평화는 옆사람이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고 자신도 옆사람을 건들지 않는 것처럼 착각됩니다.

 

그게 평화인 줄 잘못 알고 그런 평화를 누리고자 하는 말들이 성당에 다니더라도

아무하고도 어울리지 않고 그저 혼자 조용히 지내는 게 상책이라는 것이다. 소공

동체 모임이나 단체에 나가면 말만 많아지고 귀찮게 얽히는 일이 생깁니다. 그래

서 본당신부가 아침에 눈 떠서 적어도 한번은 꼭 들어야 해가 지는 이야기가 “나 이제 성당 일을 그만 두겠다”는 것입니다. 마음 산란하고 겁납니다.

 

농사를 짓겠다고 귀농하고 보면 농사가 낭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농사는 밤비소리에 일어나는 기도이고, 하늘에 대한 의탁이며 땅에 대한 헌신이고 삶의 투쟁입니다. 신앙도 낭만이 아니며 평화도 낭만이 아닙니다.

 

오늘 부활 후 5주간 화요일에 듣는 사도행전에서 “유다인들이 군중을 설득하고 사도 바오로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요즘도 군중을 설득하고 돌을 던집니다. 성당 일을 하다 보면, 이런 일 한두 번 당하는 게 아닙니다.

 

그게 농사입니다. 그렇게 일구고 가꾸는 것이 평화입니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홍수 날까 마음이 산란하고, 해가 나면 해가 나는 대로 가뭄 들까 겁이 나고, 기껏 추수하고 나면 편하게 장사하는 사람들이 지닌 세상의 경험과 잇속에 당하기도 합니다.

 

땅을 일구어 얻은 빵과 포도를 가꾸어 얻은 술을 주님께 바치면서, 햇빛에 얼굴이 타고, 다리에 쥐가 나고, 허리가 휘어져야, 주님께서 두고 가시는 평화, 주님께서 주시는 그분의 평화의 이삭을 한줌 수확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오늘은 풍년입니다.

 

학생들의 등교가 한 주일 늦어지는데, 우리 본당 주일학교 어린이와 학생들의 미사는 언제 입니까? 우리가 마스크를 벗고 미사를 할 수 있는 날은 언제 입니까? 소공동체 모임을 갖고 레지오 회합이 다시 열리고 성경 공부를 위해 다시 모이고 친교를 위한 잔치를 여는 날은 언제 입니까? 반포본당 지하실을 다시 활짝 열면, 마치 무덤에서 모든 이가 부활하는 듯한 기쁨이 먼저 솟구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기다려야 합니다. 아직은 인내해야 합니다. 방역 절차를 마치면 성전 안에 띄어서 표시된 자리에 앉으시되, 들어오신 순서대로 바깥 쪽에서 안쪽으로 들어가 앉아야 합니다. 그래야 뒤에 오신 분들이 먼저 오신 분들과 접촉하지 않고 차례로 앉습니다. 선호하시는 대로 바깥 쪽에 앉는 걸 고집하시면, 띄어 앉기로 가뜩이나 좁아진 성전에 비비고 들어가서 앉아야 하므로 접촉이 일어나고 감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성전 안에서 이리 저리 다니시면서 모처럼 만난 교우들과 인사를 나누시는 데, 이 또한 불안합니다. 아직은 성당 마당에서도 몰려 서서 인사와 친교를 나누지 마시라고 신신당부 드렸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 반포성당이 신천지나 이태원이 되지 않도록 이태원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방역 절차로 수고하시는 봉사자들께 아무리 감사드려도 모자랍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빕니다.

반포성당 사제단, 수도자, 총회장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