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간 성당문이 닫히기 전 마지막 주일 미사에 드리는 강론]

2021년 7월 11일, 연중 15주일 나해, 마르코복음 6,7-13, 반포성당

 

1.

“어, 저, 그러니까, 나는, 어,” 선생님은 목이 메었다.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리고 칠판을 향하여 돌아서서, 몽당 분필 하나를 집어서,

온 힘을 다해, 눌러서, 크게 쓰셨다. Vive La France! 프랑스 만세.”

 

알자스-로렌 지방은 지금의 프랑스와 독일 국경지대이다.

이 동네 개구장이 [프란츠]에게도 이날 교실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선생님은 모처럼 정장 차림이었다. 동네 어르신들까지 교실에 모여 계셨다.

 

Alphonso Daude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의 마지막 장면이다.

아, 이게 프랑스어로 하는 마지막 수업이라니…

프란츠는 그동안 프랑스어 공부를 소홀히 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고,

선생님은 그 마음을 읽었다. “너, 많이 후회하지? 그럼 됐다.”

 

오늘이 또 마지막 미사이다.

제가 칠판에 무언가 쓸 수 있다면 무어라 할까? Vive La Messe, 미사 만세?

앞으로 2주간, 성당 문이 닫히는 데, 딱 2주간으로 끝나면 좋겠다.

 

그런데 [알자스 로렌] 지방은 원래 독일 영토였고, 원래 독일어를 썼다.

1648년에 프랑스가 차지했다가 1870년의 전쟁에서 다시 독일이 가져갔다.

그러니, 실은 프랑스 사람들이 그리 억울해 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면서,

무엇이 그리? 서럽고, 아쉽고, 억울한가?

 

늘 해 오던 대로,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고, 마치 천부의 권리인 것처럼 누리면서,

실은 별로 고마운 줄도 모르고 흘려버렸던 은총을 새삼 깨달을 뿐이다.

작년 12월에도 그랬고, 그 전에도 그랬고, 마지막 미사를 할 때마다 그랬지만,

다시 또 미사를 시작하면, 다시 또 그렇게, 은총을 흘리고 버렸다.

예수님께서는 무어라 하실까? “많이 후회하지? 그럼 됐다?” 그러시겠는가?

 

2.

원래 신앙이란 게- 편해서 좋을 게 없다.

신앙이란 게- 근본적으로 세상과 등지는 것이기에, 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최양업 신부님의 편지를 읽어보면, 그렇게 세상을 버리고,

산 속으로 들어와 화전을 가꾸고, 옹기를 만들어 지게에 메고 팔러 다니면서,

몇 달에 겨우 한번, 사제의 방문과 미사와 영성체를 기다리며, 고해성사를 준비하다가,

때가 되면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은 선조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신앙이란 패가망신이다. 그래야 한다.

 

로마에 가면 Catacomb가 있다.

Cata는 [가운데]라는 뜻이고, Comba는 무덤으로 쓰는 동굴이란 뜻이니까,

[무덤들 가운데]라는 의미이다.

 

지하 동굴 무덤을 잇는 좁은 통로 사이에, 그리스도인들이 몰래 모였다.

여기서 신앙을 고백하던 기도문이 [사도신경]이고, 여기서 성찬례를 거행하였다.

 

신앙이 무엇인가? Catacomb이다.

신앙이란 무덤들 사이에 들어가는 것이다.

신앙이란 살아서 땅 속의 묘지를 들락거리는 것이다.

 

3.

그렇게 한 300년 지나는 동안 도무지 몇 명이 죽었는지 모른다.

정말 참혹하게, 세상에서, 부숴지고 해체되고 사라지고 흩어졌다.

 

그러다가 어느 날, Catacombs가 세상 밖으로 나와 햇볕을 받게 되는데, 그것이

서기 313년에 황제가 신앙의 자유를 선포한 [밀라노 칙령]이다.

 

이게 그저 좋은 일이었을까?

신자들이 지하묘지에 몰래 모여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던

주간의 첫날, 일요일은 당당한 공휴일이 되었고,

무덤 사이에 숨어있던 교회는- 가장 좋은 돌로 지어지고, 성상이 놓여지고,

성찬례의 성작과 성반은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되고,

사제는 로마에서 가장 화려한 의상을 갖추고, 미사를 집전하게 되었다.

 

십자가와 부활에 세상의 먼지가 묻게 되면, 그건 신앙이 아니라, 문화이다.

 

오늘이 마침 성 Benedict의 축일이다.

그분은 카타쿰바에서 나와 햇빛을 본 신앙이

순식간에 빛이 바래 한낱 세상의 문화로 변질되는 것을 탄식하면서,

일과 기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고, 수도원이 잇달아 생겼고,

교회에는 수도생활이란 특이한 [인생 행로]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4.

“너희 발 밑의 먼지를 털어버려라.”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주신 명령이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

빵도, 여행보따리도, 돈도, 여벌 신도, 옷도 지니지 말라.

 

길을 가볍게 가기 위해서, 짐을 줄이라는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제자들을 [카타쿰바]로 들여보내신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제자들을 산 속의 화전민 교우촌으로 들여보내신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문화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교양이 아니다.

신앙은 마음의 위안이 아니다.

 

기도란- 세상이 주는 [물질의 편리와, 적당한 타협의 먼지]를

끊임없이 털어버리는 작업이다.

 

영성이란, -예수님께서 처음에 그러셨듯이-, 광야에 들어가는 방향성이다.

광야에서, 세상의 유혹을 대적하는 투쟁이다.

 

그 광야에서,

빵도, 여행보따리도, 돈도, 여벌 신도, 옷도 지니지 않은 채,

오직 하느님만 바라고, 하느님의 처분에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 신앙이다.

 

그렇게 파견되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됨]이고,

그것이 파견이라는 미사의 의미이다.

 

5.

서기 313년, 로마에서 신앙의 자유가 선포되기 전에는,

신자들이 미사를 거를 때가 많았다.

지하묘지에 미사를 하러 가는 길에 누가 뒤를 따르는 것 같으면,

다른 길로 해서, 다른 곳으로 향해야 했다.

 

조선에서 박해가 끝난 것은 불란서와 조약이 맺어진 1886년이니까

불과 135년 전이고,

그로부터 7년 후 약현성당이 축성되고, 또 5년후 종현성당이 축성되었다.

그 이전에 우리 순교 선조들은 아무도 주일에 미사 참례를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런데, 뭐,

오늘이 지나면 또 2주동안 성당 문이 닫힌다고

무엇이 그리? 서럽고, 아쉽고, 억울한가?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무어라 하실까? “많이 후회하지? 그럼 됐다?” 그러실까?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묻고 계신다.

도대체 우리에게 미사가 무엇인가?

성당 문이 닫혀서, 그렇게 아쉽다고 하는데,

이 반포성당의 주일미사에서 우리는 과연 어디로 파견되고, 어떻게 파견되는가?

 

우리는 행여나 그리스도교라는 서구적 교양을 갖추고,

주일에 성당에 가는 문화를 익힌, 이 세상의 사람들은 아닌가?

 

아니라면,

정녕, 성당에 올 때마다, 발밑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영혼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정녕, 성당에서 나올 때마다, 모세가 들었던 지팡이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정녕 광야로, 카타쿰바로, 산골의 교우촌으로 향하는 제자들인가?

지금 그걸 묻고 계시지 않으신가? 예수님께서는.

 

정녕 바라기는, 성당 문이 오래 닫히지 않았으면 한다.

조선에 성당 문을 열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집안이 패가망신하였고,

얼마나 많은 양가의 사람들이 노비나 관기로 전락되었으며,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가?

 

정녕 바라기는,

반포성당의 문이 닫혀 있는 동안,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영혼 속에, 삶 속에,

오늘 복음의 이 한 줄을 힘주어 새겨 쓰기 바란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를 선포하였다.”

 

그리고 한 마디 더.

Vive La Messe, 미사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