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성전 설계에 대한 생각 7

밤새 내리는 빗소리에 젖어서 마당에 나갔다. 펼쳐진 차양 밑은 앉을 만하다. 돌계단을 바라보다 문득 닫힌 성전 안에 빗물이 새지 않을까 걱정이 든다. 지하 마리아홀에도 물이 샌다.

 

마지막 미사를 드린 지가 언제인데 왜 아직 공사를 시작하지 않는지, 이따금 듣는다. 세상살이가 간단하지 않다. 속이 타도 말을 다 못할 때가 있다. 시간이 약이다.

 

새 성전을 처음 꿈꿀 때와 지금은 세상이 다르다. 코로나19가 숨을 막더니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면서 건축비가 30% 이상 올랐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일이 아니다.

 

어차피 한 번에 다 지을 수 없는 새 집이다. 한없이 돈이 든다. 구반포 새 단지에 점차 교우들이 들어오면 조금씩 빚을 갚아가며 차차 살림을 꾸릴 터인데, 그게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이다. 그래도 기쁘고 부풀 것이다. 기도와 성사, 친교와 전교가 우리의 삶이니까.

 

들어갈 자리는 마련해 두었지만, 파이프오르간은 한참 후에나 지어 넣으려 했었다. 요즘 생각하니, 그게 아닌 것 같다. 빚을 더 지더라도, 새 성전을 여는 날,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건 금상첨화(錦上添花)를 넘어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될 것이다. 눈을 감고 미리 들어보자. 한강을 사이에 두고 명동대성당과 반포성당에서 제대로 된 파이프오르간이 울리면,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이 웃는다. 강가 바람이 분다.

 

빚 위에 빚을 더하더라도, 장차 새 성전 일부를 더 올릴 요량으로 튼튼한 기초와 뼈대를 세워 두어야한다. 새 성전을 짓고 나서 15년이면 2040년이다. 지을 때부터 비좁던 새 성전이 더 비좁아지겠지만, 그때는 용적률 규제가 풀릴 가능성이 높다. 물론 예상일뿐이지만, 이미 선거 공약으로 나온 바 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럴 수밖에 없다. 전례공간 위를 더 올릴 수는 없지만, 사제관이 들어서는 주거공간 위에 몇 개 층을 더 올릴 수 있다. 이른바 ‘확장성’이다. 그걸 내다보고, 이번에 지을 때 받침 구조와 버팀 강성을 최대한 확보해야 한다. 그게 다 돈이다. 무모한 예지(豫知)와 배짱으로 돈을 묻어두는 것이다.

 

새 성전을 짓고도 좋은 말 듣기는 이미 글렀다. 워낙 좁은 땅에 큰 성전을 짓자니, 친교실, 회합실은 처음부터 어그러졌다. 철없는 불평은 철마다 되풀이될 것이다. 하기야, 아무리 넓고 크게 지은들, 좁아진 마음에 찰 수 없다. 지상의 교회는 어차피 미완성이다. 교회의 완성은 하늘나라의 ‘보이지 않는 집’이다. (묵시21,22) 그 집을 가리키는 것이 성미술이다. 1979년에는 김교만 아우구스티노 님께서 성전을 꾸몄다. 감실과 제대, 예수부활상과 그리스도왕 상징을 몸소 제작하고, 모든 성미술품의 조화를 이루셨다. 이른바 ‘성미술 총감독’이셨다. 43년이 흘렀다. 이제 2022년, ‘보이지 않은 집’을 가리킬 ‘성미술 총감독’을 하느님께 청해야 한다.

 

새 집은 헌 집의 시작이다. 그게 허무는 아니다. 본디 땅은 하늘을 향하는 법이다. 그 자취가 역사이다. 역사는 과거의 회상이 아니라 미래의 통찰이다. [기억상자 Time Capsule]를 심으면 돌이켜보며 내다 볼 것이다. 지금 짓는 새 집이 헌 집이 되어 헐리는 날, 우리가 어떻게 헌 집을 새로 지었는지, 헐고 짓는 시간 속에 하늘을 향해 어떤 몸짓을 했는지 담아두면 좋겠다. 우리가 묵시록처럼 미래의 기억을 담아 심으면, 창세기 같은 과거가 줄줄이 영글 것이고, 후손들은 그 신비를 캐낼 것이다. 기억상자만한 기도가 또 있을까?

 

날이 새면, 행여 비가 새지 않았는지 닫힌 성전을 열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