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성지순례

한마디로 ‘삼삼한’ 순례였습니다. 2022년 6월 23일(목) ~ 25일(토), 3·1 독립을 선언한 33인의 민족 대표 못지않은 기개로 반포성당 순례자 33명이 국내 주요 성지 10곳을 순례하고 왔습니다. 고석준 아우구스티노 주임신부님의 사목 계획에 진작 포함돼 있었으나 코로나19로 계속 미뤄지다 마침내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순례 기간에 큰 장맛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 여행 짐에 날씨 걱정 한 보따리까지 더해 꾸렸는데, 막상 비가 내리다가도 걸을 때가 되면 그치는 희한한 조화로 우리의 순례길은 거칠 게 없었습니다.

 

첫 순례지인 공세리성당을 시작으로 충청남도에 위치한 솔뫼성지(성지 미사 참례), 해미성지, 갈매못성지를 순례하고 군산으로 가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이튿날에는 전라북도의 초남이성지와 전동성당(단독 미사 봉헌), 천호성지를 순례한 후 200여 km를 달려 대구에서 두 번째 밤을 맞았습니다. 다음 날 관덕정 순교 기념관과 한티성지를 거쳐 왜관에 있는 성 베네딕도 수도원(단독 미사 봉헌)을 끝으로 모든 순례 일정을 마치고 귀경했습니다. 꿈같은 3일이 눈앞에 보이는 듯 삼삼합니다.

첫 순례지인 공세리성당
마지막 순례지인 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

당초 계획을 짤 때부터 성지 설명을 여행 가이드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 하기로 정했기 때문에, 열 분의 대표가 각자 맡은 성지에 관해 미리 공부해 온 내용을 현장에서 발표하였습니다. 이 방식을 제안하신 고 신부님께서는 발표자를 위한 선물을 따로 마련해 갖고 오셨습니다. 서울대교구 성지순례 길이 그려진 손수건인데, 답례로 주시며 풍자하는 말씀이 재밌어 가는 곳마다 박장대소했습니다.

 

원래 손수건 가격은 29,000원인데 숫자 2가 지워져 9,000원으로 쓰여 있습니다. 근데 요즘 물가가 계속 올라 이게 점점 더 비싸질 겁니다.”

 

신부님께서는 정가 9,000원인 손수건을 얼렁뚱땅 29,000원으로 둔갑시킨 것도 모자라 자꾸 만 원씩 값을 올려 마지막 발표자에게는 79,000원짜리로 선사하셨습니다. 그러고는 손수건을 받지 못한 나머지 교우들이 마음에 걸리셨는지 초남이성지에서 기도 자료집 [어떻게 천주를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를 사서 모두에게 나눠 주셨습니다. 격의 없는 농담으로 유쾌한 분위기를 자아내면서도 성지순례 본연의 의미를 잊지 않도록 교우들을 내내 세심히 살피고 이끄셨습니다.

최연소로 참가한 초등학교 6학년 박시현 어린이에게 발표자 선물을 주고 계신 고석준 신부님
가격 상승 폭이 극심했던(^^) 서울대교구 성지순례 길 손수건
전주교구 발행 기도 자료집

순례 일정의 진행은 가톨릭여행사의 김원창 미카엘님이 맡으셨습니다. 국내외 성지 뿐만 아니라 가톨릭 신앙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지니셔서 깊은 인상을 남긴 분입니다. 무엇을 질문하든 기대 이상의 대답을 하셨는데, 그도 그럴 것이 신학교를 다닌 경력이 있다고 하십니다. 특히 이번 반포성당 성지순례에서 고석준 신부님을 37년 만에 다시 만났다고 밝히시면서 아직도 신학교에서 전설로 회자되고 있는 신부님의 일화를 들려 주셨습니다.

김원창 미카엘 가이드님

1985년의 일입니다. 신학교 1학년 학생이었던 저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반정부 시위를 하다 혜화파출소에 끌려 갔습니다. 모두 풀이 죽어있을 때 파출소 문을 박차고 고석준 신부님이 들어오셨습니다. “나 고석준 신분데, 우리 애들 당장 풀어 주시오”라고 외치시곤 당당히 신학생들을 모두 데리고 나오셨습니다.

 

신부님은 이에 대해 “당시 4학년 수석 학생(Primus)으로 부제였고, 파출소에서도 ‘부제’임을 분명히 밝혔으나 그 단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관계자들이 신부보다 더 높은 지위로 알아 그냥 쉽게 학생들을 풀어준 것 같다”고 웃으며 정정하셨습니다. 부제건 신부건 간에 풍채 좋고 배포 큰 우리 신부님이셨기에 가능했던 에피소드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발길 닿는 곳마다 순교 성인들의 굳은 신앙심과 숭고한 희생을 보고 배웠지만, 천호성지 아랫마을에 있는, 옛날 교우촌의 돌을 날라 지은, 다리실순교자기념관에서의 경험은 아주 특별했습니다. 50년 사제 인생을 한국의 초기 교회사 연구와 순교자 삶을 기록하는 데 바치신 김진소 대건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우리를 친히 맞아 바우배기에서 발견한 가장 오래된 십자가 유물과 옥중 편지를 보여 주시며 순교자의 영성을 깊이 심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물이나 사람의 생김새나 됨됨이가 마음이 끌리게 그럴듯하다는 ‘삼삼하다’의 또 다른 의미에서 볼 때도 역시 ‘삼삼한’ 순례일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가장 오래된 십자가 유물을 보여 주시는 김진소 대건안드레아 신부님
십자가에 친구(親口)하는 교우들
순교자의 옥중 편지

단독으로 미사를 봉헌한 전주 전동성당에서는 부부 참가자 세 쌍의 혼인 갱신식도 치뤄졌습니다. 이곳에서 혼배미사를 드린 소해룡 안드레아님과 범진순 아녜스님 부부는 물론 이준영 알베르토님과 신정순 글라라님 부부, 그리고 유정호 필립보님과 양인원 율리아나님 부부가 주인공이셨습니다. 신부님의 깜짝 계획으로 혼인 갱신식을 마친 분들이 앞다투어 결혼 답례품을 주시는 바람에 지역 명물인 초코파이도 배불리 먹고,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는 성인 패도 받았습니다.

혼인 갱신식

먹는 이야기를 하는 김에, 순례 기간 동안 음식도 ‘삼삼하게’ 맛있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성지에서의 점심은 어머니의 손맛이 듬뿍 들어가 있었고, 촘촘한 일정을 마치고 마주한 저녁 식탁은 하루의 피로를 풀어줄 만큼 넉넉하고 즐거웠습니다.

첫날 저녁 식사
둘째 날 저녁 식사

2박 3일 순례 일정의 마지막은 경북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의 미사였는데 이 장면은 아마도 가장 오랫동안 뇌리에 남을 것 같습니다. 돌아가면서 손을 맞잡거나 포옹하며 나눈 평화의 인사, 양형 영성체도 눈에 삼삼하지만, 43년 전 신학교 입학 전에 마지막으로 성소를 확인한 곳에서 드리는 고석준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미사 강론도 기억에 남습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게 순교이며, 사랑과 용서의 마음 바탕을 만드는 게 기도입니다. 1,600년 전통의 수도원 정신을 우리 몸에 파 묻어야 합니다. 분도(베네딕도) 성인 패를 가슴과 생활에 묻읍시다. 그리하여 멀리 바라보며 우리 자신을 비웁시다.

 

파노라마로 찍은 사진
평화의 인사 나누기

4시간 가까이 걸린 귀경길 버스 안에서 최연장자이신 나희균 크리스티나 어르신을 시작으로 각자 소감 한마디씩을 나누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초남이성지 방문을 적극 추천하신 분답게 초남이성지 순례의 감격을 전하시며 단가 ‘팔도유랑가’를 부르셨습니다. 이번에 참가하신 90대 어르신은 모두 세 분입니다. 지면의 제약으로 모든 분들의 소감을 전부 옮기지 못해 아쉽지만, 요약하면 성지순례를 통해 나의 신앙을 점검, 쇄신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좋은 기회에 감사하고, 또 가고 싶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지금 반포성당은 새 성전 건립의 역사적 사명 아래 놓여 있습니다. 이를 잘 아는 우리들은 그 옛날 천주님에 대한 믿음 하나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신 무명 순교자들을 상기하며, 순교의 영광을 이루도록 인도하신 성령님께서 반포성당이 내딛는 새 성전에의 발걸음 또한 이끌어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순례 기간 동안 쉬지 않고 합송한 ‘새 성전을 지으며 바치는 기도’가 하늘에 닿았을 것을 믿습니다.

 

국내 성지순례 기회를 마련해 주신 고석준 주임신부님과 모든 일정을 차질 없이 준비, 진행하신 사목협의회 총무단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2022년 6월은 정말로 삼삼했습니다! 고맙습니다.

 

♦ 누리집 사진방에 성지 10곳의 순례 사진들을 일자별, 성지별로 올렸습니다. 함께 보시면 더 쉽게 공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실 분들을 위해 금번 성지순례 일정표를 아래에 붙입니다.

성지순례 일정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