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현 프란치스코 前 총회장]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

2019. 11. 10. ~ 2022. 01. 26. 반포성당 사목협의회 제19대 총회장을 역임하셨던 우성현 프란치스코 前 총회장님을 모셨습니다. 우성현 프란치스코 前 총회장님은 반포성당에서 35 년여 동안 교우이시면서 구역장은 물론 레지오의 쁘레시디움 단장과 꾸리아 단장, 사목회 부회장, 연령회장, 남성총구역장 등을 두루 역임하셨습니다. 매일 한결같이 새벽미사에서 기도하시는 모습이 귀감이 되었던 총회장님을 모시고 소중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 총회장님께서는 어떤 계기로 주님을 알게 되셨고, 반포본당과의 인연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공군 학사장교로 근무하던 대구에서 제대(전역) 말년(1976년)에 동네 어른들의 중매로 선을 보게 되었어요. 같은 고향(面) 출신의 여성이라 해서 기이한 인연이 아닌가 하며 호기심이 갔었으나 천주교 집안임을 알고는 그 당시 무교인 저는 고민과 갈등이 컸습니다.

 

만나보니 단순한 천주교 신자 집안이 아니라 천주교 4대의 구교 집안으로 당시만 해도 집안에 사제가 2분 수녀가 3분일 정도로 쟁쟁한 천주교 집안이었지요. 만약 내가 혼인을 하게 되면 맏사위가 되고, 집안 분위기를 감안할 때 천주교를 믿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고민을 많이 했어요. 거듭되는 고민이 있었지만 결혼 조건에 천주교신자가 되는 것은 자율에 맡긴다 하니 결혼부터 하고 상황을 봐가면서 결정하면 되겠구나 했어요. 그 당시 타 종교에 비해 천주교에 대한 호감도가 괜찮아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선을 보고 두어 달 만에 대구대교구 주교좌성당인 계산성당에서 처삼촌 신부님의 주례로 관면혼배를 올리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전역 후 서울에 취직이 되었는데, 아내는 대구에서 교편을 잡고 있어 바로 서울로 올라오지 못하고 주말부부로 1 년여를 지내게 되었어요. 그때 하숙생 신세로 저녁에 혼자 할 일도 별로 없어 차라리 이 기회에 천주교 교리나 들어볼까 하는 마음이 생겨 명동성당에 예비자 등록을 하였고 젊은 신부님으로부터 교리를 들었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서울로 올라온 이듬해인 1977년 12월 성탄절에 세례를 받게 되었어요. 이때까지만 해도 집안에서 어느 누구도 성당에 나가보라는 권유도 하지 않으셨고 저도 교리 공부를 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리지 않았어요. 그래도 세례 날 임박해 이를 알렸더니 집안 모두 온통 기쁨으로 난리가 난 걸 보니 드러내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하루빨리 제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면 하고 많이 기다리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당시 처 고모할머니가 명동성당 내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에 계셨는데 손서인 제가 명동성당에서 세례를 받게 되었다고 말씀드리니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반포성당과의 인연은 결혼 후 10여 년 해외 및 지방현장 파견생활 끝에 1987년 마침 서울 반포동 인근 현장으로 발령을 받았고, 고속버스터미널이 가까운 반포2동에 자리를 잡아 가족이 이사를 하게 되었어요. 현재까지 줄곧 반포 토박이로 그리고 이재가 밝지 못해 이곳에만 살다보니 어언 35 년여 반포성당 한 성당만 다니게 되었지요. 두 아들의 혼배미사를 모두 여기 반포에서 올리게 되는 큰 연을 갖게 되었습니다.

 

▶ 반포성당 공동체에서 총회장을 맡게되셨을 때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압니다. 총회장을 맡으셨던 기간 중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일과 가장 기쁘고 보람을 느끼셨을 때는 언제인지 이야기해 주십시오.

 

2019년 11월 제가 총회장에 취임하면서 오랜 남성(총)구역장 경험으로 반포본당 공동체를 “섬김, 사귐, 나눔의 모범 본당으로 가꾸어보자”고 포부를 밝히면서 여러 가지 구상을 했습니다. 그러나 해가 바뀌자마자 코로나 사태가 터져 급기야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음은 물론 혹독한 박해와 전쟁 때도 중단된 적이 없었다던 미사가 2월부터 3차례에 걸쳐 126일이나 중단된 암울한 시기를 보내야 했습니다.

 

재임 중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일은 당연히 미사가 중단되어 굳게 성당 문이 닫혀 교우님들의 발걸음이 끊긴 채 적막한 본당을 속절없이 바라보는 일이었고 또한 미사가 재개되었어도 엄격한 출입인원 제한이 따랐고 심지어 10% 제한일 경우 고작 65명, 20%라도 130명만 입장이 가능해 선착순으로 입장시키다보니 부득불 정원 초과된 교우님들을 성당 문 앞에서 때론 신부님과 때론 총무님과 양해를 구하며 되돌려 보낼 때의 심정은 송구하기 그지없고 마치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또한 가장 기쁘고 보람을 느꼈던 일도 코로나 대처 방역과 관련한 일들이에요.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미사가 중단됐다 재개되면서 대두된 문제가 미사 전후 방역 문제였습니다. 어렵게 재개된 미사가 방역 소홀로 다시 미사가 중단되는 불상사가 발생돼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방역에 대한 총괄지휘책임자인 주임신부님과 실무 총괄책임자인 저는 보다 효율적인 방역을 위해 구청과 교우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조직 구성과 방역 지침을 수립해 실시했는데, 가장 큰 특징은 미사 전후 방역 모두 우리 힘으로 다 했던 일입니다.

 

대부분의 타 본당은 미사 후 소독 방역을 외주 또는 관리인이 분무 형식으로 손쉽게 해결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는 분무는 효과가 없다하여 일일이 약품 천으로 탁자와 의자를 닦은 후 다시 깨끗한 물걸레로 닦는 방법으로 했어요. 여기에 많은 인원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임무를 부여받은 어느 단체 어느 개인도 불평 하나 없이 잘 응해 주신 데 대해 너무너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방역 소홀로 불미스런 일이 전혀 없이 미사가 잘 봉헌될 수 있었기에 모든 분들에게 거듭 감사를 드립니다.

이임식에서 던진 농담처럼 “제가 코로나를 불러왔으니 이제 제가 물러남으로써 코로나도 하루속히 물러날 것”으로 기대합니다.

▶ 한결같이 새벽미사에 참석하시면서 기도하시는 모습이 교우들에게 모범이 됩니다. 미사 참석과 기도에 대한 총회장님의 이해를 나눠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레지오 입단 이듬해인 2010년 3월 나이가 넘어 추천을 받아 꾸르실료를 다녀온 이후 매일 새벽미사를 다니기 시작했어요. 지금까지 국내에 있는 한은 눈비 가리지 않고 무슨 일이 있어도 매일미사를 거르지 않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제 욕심으로는 죽을 때까지 매일미사를 참례하다 하늘나라로 갈 수 있길 기원하고 있습니다.

 

하루 일과를 미사로 시작하고 있는데, 미사는 모든 전례 중 가장 기본이며 핵심이 되는 전례입니다. 미사성체를 통해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신비에 참여하고 거룩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거룩한 그리스도의 성체를 영함으로써 주님의 현존과 함께할 수 있고 하루 내내 주님 안에 살아가는 삶의 원천에 힘을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루의 일상적인 기도생활은 코로나 전에는 성당에 좀 일찍 나가 소성무일도와 그날의 매일미사 책을 미리 읽고 여타 기도를 바치곤 했는데 코로나 이후로는 성당에 일찍 나갈 수 없어 5시 전에 일어나 집에서 소성무일도와 미사 책을 미리 읽고 아침기도를 바치고 있어요. 일상적인 기도는 새벽미사 후 산책을 하면서 묵주기도 10단 정도 하고 낮에 틈틈이 나머지 10단을 하여 묵주기도는 여러 가지 지향을 두고 매일 20단을 하며 저녁에는 소성무일도와 자기 전 아내와 함께 저녁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기도는 될 수 있는 한 기복기도를 지양하고 항구하게 절실한 마음으로 바치면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으로 하고 있어요. 또한 이제까지는 바쁜 이유로 관상기도를 잘 못 했는데 앞으로는 자주 관상기도를 통해 주님을 좀 더 자주 깊게 만나고 싶은 욕심입니다.

 

▶ 총회장직을 떠나시면서 현재의 반포성당 공동체 봉사자들에게 봉사자로서의 책임감이나 당부의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60세가 넘는 늦은 나이로 단체에 가입하여 본당 여러 단체의 책임 있는 자리를 경험하고 불과 10여 년 만에 총회장까지 봉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이라면 순명과 희생정신이 뒷받침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도 회사를 운영하는 생업도 있고 앞에 잘 나서는 성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부님의 부름을 받거나 선배나 동료들의 추천이 있을 경우 최대한 순명을 했어요. 때로는 몸담고 있는 조직에서 후임 물색으로 진통을 겪고 있을 때 희생정신으로 자원하다보니 짧은 기간에 많은 경험과 봉사를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우리 본당은 2018년도 사목계획서 기준으로 볼 때 구역 소공동체와 레지오를 제외하고도 일반단체가 60여 개에 이르고 사목위원 30명 포함 230여 명의 간부 봉사자 외에도 레지오의 쁘레시디움 4간부 약 160명을 비롯 각 단체에 소속된 많은 분들의 봉사와 노고로 톱니바퀴 돌아가듯 본당 공동체가 운영되고 있어요.

 

저는 평소에 본당 봉사자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성의만 있으면 누구나 다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의를 가지고 열심히 봉사하기만 하면 그 결과는 성령께서 다 알아서 하신다는 생각입니다. 지나친 사양과 기피는 결코 신앙인의 자세가 아닐 것이며 순명과 희생정신의 결여에 기인한다고 보여집니다. 본당 봉사도 다 때가 있으니 기회가 주어질 때 좀 더 순명의 자세로 받아들이는 식별이 필요해요

 

봉사를 하게 되면 분명 시간도 빼앗기고 희생도 따르겠지만 주님의 은총 또한 많이 받게 됨을 스스로 느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저는 지난 1월 20일 명동성당에서 남보현 샤를 드 푸코 사제 서품식을 다녀오다 충무로 환승역 계단에서 넘어져 순간 정신을 잃은 채 25계단을 쏜살같이 미끄러져 내려오면서 한 분을 치고 바닥에 부딪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당시 부딪친 소리가 너무 컸다며 순식간에 승객들이 몰려들어 119와 경찰을 부르는 소동 끝에 응급차를 타고 성모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어 CT와 많은 X-Ray를 찍었습니다. 다행히도 어깨와 머리 타박상 외 뇌출혈 및 골절의 징후가 전무하다는 진단을 받고 바로 퇴원한 일이 있었습니다. 주변에서도 이는 바로 주님과 성모님의 보살핌의 결과가 아닐까 했습니다. 저도 감히 이게 바로 기적의 은총을 입었다는 생각이 짙게 드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본당 봉사는 가능한 한 능력이 출중하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이 여러 가지를 맡는 것보다 능력이 좀 못해도 한 사람이 한 가지씩만 맡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요. 보다 많은 교우들의 참여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전문적인 분야가 아니라면 최대한 주어진 임기를 지켜 보다 많은 교우들이 본당 봉사에 참여할 수 있게하며, 임기에 대한 부담을 덜어 후임 선출이 용이해져 선순환된다고 생각합니다.

 

우성현 前 총회장님은 좋아하는 성경으로 불행은 죄와 무관하며 갖은 시련에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끝내 전능하신 하느님을 경외하게 되는 구약의 [욥기]를, 좋아하는 구절로는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욥 2, 10)를 말씀하셨습니다. 평신도 사도직 봉사자들을 위해서는 매년 서울대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에서 주관하는 공의회 학교를 통해 제2차바티칸공의회 관련 서적을 추천하며 인터뷰를 마쳤습니다. 추운 날씨에도 반포성당 신자들을 위해 귀한 경험을 나누어주신 우성현 前 총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강직하고 훌륭한 리더이신 총회장님과 함께 사목회 활동을 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사랑합니다!!

 

인터뷰 진행 및 정리: 이은경 모니카 (사목협의회 청소년분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