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용우 마리아 유리화 작가] “해와 달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반포성당에는 본당의 상징물이 된 지붕위의 ‘참회의 수탉’ 조형물과 마당의 성모자상, 성전 중앙에 높이 매달려 계신 십자고상 이외에도 소중한 성미술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처음 성당을 지을 때 특별히 제작된 스테인드글라스는 성전 양편과 2층 성가대석, 그리고 입구 로비의 창문을 통하여 들어오는 햇살을 마치 하느님이 직접 그리신 듯한 아름다운 빛의 무늬로 바꾸어주는 자랑거리입니다.

 

40여 년 전 이 귀한 스테인드글라스를 디자인해 주셨던 남용우 마리아 선생님을 2021년 7월 12일(월)에 찾아뵙고, 1950년대 말 당시에는 생소한 예술 분야였던 유리화를 공부하기 위하여 독일로 유학하신 일, 선조 때부터 순교로 치명하시기까지 신앙을 지켜 오신 남다른 집안 내력, 그리고 우리나라 성당과 교회 약 150곳에 스테인드글라스와 유리모자이크를 제작하셨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작품 활동에 관하여 귀한 말씀들을 들었습니다.

 

인터뷰중이신 남용우 마리아 화백

인터뷰 당일, 장마 뒤에 찾아온 폭염을 잊게 할 만큼 시원한 푸른빛 체크무늬 블라우스 위에 바바리아 지방 특유의 여밈 장식이 멋진 조끼를 걸치시고 옷차림에 딱 어울리는 큼직한 네이비색 캔버스 가방속에 보여주실 사진과 화집들을 챙겨 들고 오신 남용우 마리아 선생님은, 얼마전 넘어져 다치신 탓에 짚고 다니시는 지팡이만 아니라면 학교에 공부하러 나선 여대생처럼 젊은 분위기이셨습니다. 1931년생이시니 올해 90이신데 그 연세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세도 꼿꼿하시고, 다리를 다치시기 전까지는 운전도 손수 하셨다고 합니다. 선생님을 모시고 댁 근처 호텔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서 저희가 궁금하던 이야기의 보따리를 풀어보기로 했습니다.

 


 

저희가 주변에서 103위 성인의 후손이 되시는 분들을 만나 뵙기란 쉽지 않습니다선생님께는 103위 성인 중 가장 벼슬이 높으셨던 남종삼 요한 성인의 증손녀가 되시는데요. 성인께서 순교하실 때 그 부친과 맏아드님도 함께 처형되셨고 남은 가족들은 유배를 가셔야 했지요. 이처럼 신앙을 지켜낸 가문에서 나고 자라신 것이 선생님께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요?

 

사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나오기는 했지만, 평소에 인터뷰나 뭐 그런 것을 가능한 피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제가 남종삼 요한 성인의 후손인 것을 아는 게 두려워서이지요. 저만 그런 줄 알았더니 제 형제들도 다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선조님께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지 못해서 행여 그분 후손인 것을 누가 알기라도 할까봐 그저 숨고만 싶은 마음입니다.

남 마리아 화백의 3대조 할아버지이신 남종삼 요한 성인

그 말씀은 당치 않으십니다. 다른 일들은 제쳐두고라도 대한민국 미술사에 있어 1세대 유리화 작가로 자리매김을 하셨고 그토록 많은 성당과 수도원과 교회에 성미술작품을 남기신 공로로 가톨릭미술상도 수상하셨는데요. 또 형제분들과 후손대에서 사제와 수도자도 많이 나오시고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성공하셨고요.

 

제가 위로 오빠가 두 분 계시고 막내 남동생이 있는데 딸 다섯 중 저와 바로 위 언니 둘만 빼고 위의 세 언니가 모두 샤르트르회 수녀가 되었지요. 그런데 사실 저는 제 이야기보다는 우리 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아버지는 정말 대단하신 분이셨지요. 저희집이 형제가 이렇게 많은 것도, 우리 아버지가 천애 고아로 자라시면서 너무 외로우셔서 무조건 아들딸을 많이 낳아야겠다고 생각하셨대요. 그런데 그 많은 아이를 기르시면서 한 번도 언성을 높이시거나 화난 얼굴을 보이신 적이 없어요. 제가 국민학교 다닐 때, 집에 돌아와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시시콜콜 다 얘기해드리면 그걸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잘 들어주셨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집으로 찾아오는 손님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바쁜 분이셨는데도 말이죠.

남용우 마리아님의 어릴 적 가족사진. 앞줄 맨 왼쪽이 남 마리아님. 뒷줄에 어머님과 아버님 사이 서 계신 분은 4년 전 109세로 선종하시기 전까지 한국 최고령 수도자이셨던 큰언니 남형우 세자요한 수녀님.

사진으로 뵙는 아버님 남상철 프란치스코님은 고고한 선비의 풍모이신데 그렇게 다정다감한 면이 있으셨군요.

 

네. 정말 최고의 아버지셨어요. 그러나 제가 우리 아버지를 존경하는 진짜 이유는 평생을 하느님 일을 위하여 사신 그 신앙 때문입니다. 천주교연맹 이사장을 지내셨고 또 한국 가톨릭교회의 첫 탄생지인 천진암성지를 찾아내신 분이 저희 아버지이십니다. 작은 불교 암자 하나만 있던 그 지역을 틈날 때마다 답사하시고, 교우들이 숨어 지내던 터를 일일이 발굴하시고 조금이라도 여유자금이 생기면 땅을 사서 한 평 한 평 늘려 가시곤 했지요. 답사 다니실 때 항상 막내 남동생을 데리고 다니셨는데, 동생 하는 말이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 숲속을 그렇게 마냥 헤매고 다녔었다고… 동생이 어린 나이부터 카메라를 들고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여기 찍어라, 저기 찍어라 하실 때 마다 사진을 찍었는데 그래서 그랬는지 기계공학과 교수가 되었지요. 그렇게 찾아내고 알아내신 자료를 수원교구에 다 주셨는데, 당시에 천진암의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는 분들이 많지 않아서 안타까운 일도 많으셨어요.

 

예술을 하시는 분들은 그 어떤 소명 같은 것이 있어서 어릴 때부터 남다른 자질을 나타내시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떤 계기로 미술을 전공하시게 되었고, 또 당시로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분야인 스테인드글라스를 공부하시게 되었는지요?

 

제가 미술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도 사실은 이런 부모님 아래서 여러 형제자매가 하느님을 우러르며 자라난 분위기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지요. 위로 세 언니가 수녀가 된 뒤 저도 어릴 때부터 막연히 나도 수녀원에 간다고 생각하며 자랐고, 수녀회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재능이 미술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그쪽으로 마음을 두게 된 것이어요. 원래는 회화를 공부했었는데 제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다닐 때 여학생을 잘 뽑지도 않는 응용미술학과에 들어가자 당시 학장님이시던 장 발 선생님이 스테인드글라스 공부를 해 보라고 권하셔서 독일에 유학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남용우 마리아 화백

대학 졸업 다음 해 국전에 출품하여 특선을 수상하시고, 여러 번 개인전을 여신 후 독일로 유학 가셨지요? 한국동란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우리나라와 문화 차이가 컸을 것 같습니다.

 

원래 독일의 유리화 전통은 대단한 것이어서 배울 것이 정말 많았습니다. 불순물 없이 유리를 제작하는 과정도 그렇지만 완벽한 색을 만들어 내기 위한 장인정신은 대단합니다. 푸른색, 붉은색이라고 해도 들어가는 물감과 금의 성분 조합에 따라 셀 수 없이 다양한 색들이 나오거든요. 이걸 만드는 방법은 물론 각 색깔에 붙은 일련번호조차 아무에게나 잘 알려주지 않아요. 제가 독일의 뮌헨대학과 쾰른 공예학교에서 공부 마친 후 20년 가까이 일했던 Derix 공방 같은 경우, 중세시대부터 천 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전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이 공방의 운영철학 전반에 면면하게 흐르는 신앙심입니다. 매일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직원들이 모여서 성경 위에 손을 얹고 기도로 시작을 하고 정기적으로 전 직원이 피정을 가지요.

 

그렇게 기도와 묵상을 바탕으로 제작되는 스테인드글라스이니까 예술성에 더하여 영성도 충만한 귀한 작품들이 만들어지는 것이군요. 반포성당이 지어질 때 디자인 해주신 스테인드글라스도 Derix 공방에서 제작되었지요. 선생님의 1970년대 활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히고 있어 교우들에게 항상 자부심을 주는 귀한 선물인데 너무나 죄송스럽게도 <시작과 끝>을 의미하는 로비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위치가 잘못 끼워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반포성당 스테인드글라스를 맡게 된 것도 하느님의 이끄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제가 아직 독일에 있었는데,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비행기를 세 번이나 갈아타면서 황망하게 귀국해서 5일장의 마지막을 겨우 지킬 수 있었지요. 그런데 이렇게 아버지를 떠나보내면서 제가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돌아가시기 한 달쯤 전에 한국에 와서 아버지를 뵈었는데, 그때도 천진암성지를 만드는 데 여념이 없으시던 아버지께서 주변 땅을 사려면 돈이 필요하다고 하셨어요. 그 청을 들은 척 만 척 하고 독일에 돌아와서 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거지요. 어찌나 가슴이 찢어지던지… 그러던 차에 전혀 예상치 못하게 반포성당으로부터 새로 짓는 성당에 저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넣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작품 디자인료 전액을 천진암성지 변신부님께 전해달라고 하고서 저는 백 원 한 장 받지 않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독일에서 전문적으로 제작된 유리 가격이 당시 한국사회의 기준으로는 너무 비싸서 제가 무척 욕을 많이 먹었다고 하네요.

그 일도 그렇고 패널이 바뀌어서 끼워진 로비 유리화도 그렇고 속이 상해서 그 후 반포성당 근처에 갈 일이 있어도 멀리 돌아다니곤 했지요. 제작비에 대한 오해는 십 년쯤 후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 독일에서 제작된 유리화가 설치될 때 가격이 훨씬 더 비싼 것을 보고나서 풀렸다고 듣기는 했습니다만.

또 하나 에피소드는, 제가 독일에서 반포성당 유리화 작업을 할 때 담석증이 도져서 통증이 어마어마하게 심했어요. 그런데 배편으로 완성된 작품을 부치는데, 당시만 해도 배가 자주 다니지를 않으니까 한 번 배편을 놓치면 다음 배가 떠나기까지 40일 넘게 기다려야 하는 거예요. 나는 담석 때문에 아파서 꼼짝 못 하겠는데, 반포성당에서는 성전 완공날짜에 맞추어 스테인드글라스를 받아야 하니 재촉이 심했지요.

 

그렇게나 고생을 하며 만드신 작품이고 또 디자인료도 모두 봉헌하신 셈인데. 제작비를 둘러싼 마찰은 원하는 색을 제대로 내기 위하여 금가루도 들어가는 독일산 유리의 가격을 이해 못 해서 생긴 오해였군요. 나중에라도 그 진가를 알게 되어 다행입니다. 반포성당 로비의 잘 못 설치된 유리화도 이번 재건축을 기회로 꼭 바로잡도록 하겠습니다. 반포성당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하실 때 가장 염두에 두신 영감이랄까, 작품을 통해서 전하고자 하셨던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유리화를 구상하면서 늘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은 “해와 달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하늘의 별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하는 노래입니다. 유리화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없고 그것을 통하여 들어오는 빛이 있어야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항상 작품을 만들 때 성당 안 공간뿐만 아니라 밖에서 들어오는 태양광선의 효과를 스테인드글라스의 조형 요소에 포함시키고자 노력합니다. 가능한 밖에서 들어오는 빛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서 색도도 조절하고, 또 지역에 따라 해가 비치는 강도가 다르므로 그것도 고려해야 하고요. 여기에 각각의 작품마다 그 건물의 특성을 고려해서 강조하고자 하는 요소들이 있지요. 반포성당의 경우 입구 로비 창은 ‘시작이고 끝이다’라는 성경 말씀을 형상화했으며, 성당 내부 창은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추상적인 선묘가 반복되는 구성인 반면, 2층 성가대석 스테인드글라스는 환희의 신비를 형상화한 장미꽃 모티프를 단순화해서 표현했습니다. (글 첫머리 사진 참조)

 

2층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하여 들어오는 빛에 비추인 십자고상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로 반포성당의 성전 2층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서 들어오는 빛이 아침이면 천장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의 십자고상을 마치 성혈처럼 붉은색으로 아름답게 물들인답니다. 제대를 바라보고 오른쪽에 있는 유리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색색의 빛들이 성모상 뒤 편 벽쪽에 은은한 수채화를 그리기도 하고요. 로비의 스테인드글라스도 부디 바로잡아서 선생님께서 표현하시고자 했던 시작과 끝의 이미지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현재의 반포성당 로비 유리화(위)와 남 마리아 화백의 원본 디자인(아래). 1981년 백상기념관에서 개최하신 개인전에 이 유리화를 도록 표지 사진으로 사용하실 만큼 애정이 깊으신 작품인데 우리 성당에서 배치를 잘못하여 너무나도 죄송한 마음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동안 여러 차례의 개인전 이외에도 전국 150여 개 성당과 수도원, 그리고 교회에 스테인드글라스와 유리 모자이크를 설치하실 정도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셨고 또 여러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시어 그분들이 지금 한국의 유리화를 이끌어나가고 있지요. 최근까지도 일손을 놓지 않으시다가 작년 이후로 작업을 하시지 못하고 있으니 매우 답답하시겠습니다.

 

제가 천진암성지 성당에 14처를 맡아서 3처까지 마치고 다음 4처를 만들던 중에 다리를 다쳐서 지금 손을 놓고 있으니 마음이 무척 안타깝습니다. 일단 운전을 못 하니까 오고 가기가 힘들어서요. 전화만 걸면 밤중에도 운전기사를 자청하는 제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매번 부탁할 수도 없고, 어서 나아서 다시 작업을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제가 오래 살다 보니 우리나라 가톨릭 미술사나 순교 성인들 관련 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어서 여기저기서 자문하고, 또 7월 중순에 개관 예정인 서울공예박물관(SeMoCA)에서도 연락이 오지만 지금은 천진암성지 일을 마무리 하는 것에만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와는 또 다른 느낌을 주는 남용우 화백의 유리모자이크화(부분). 흑석동성당

이제까지 살아오시면서 하느님께 가장 감사드리고 싶은 일을 꼽으라면 어떤 것이 있으실까요?

 

무엇보다도 우리 부모님 같은 어머니 아버지를 주신 것에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정말 대단한 분이셨고, 아버지가 자상하셨던 반면 어머니는 좀 엄하셨지만, 한시도 쉬지 않고 일을 하시며 많은 식구를 이끌어가셨어요. 죽으면 썩어 없어질 이 손을 아껴서 무엇 하느냐고 늘 말씀하셨지요. 아버지를 찾아오는 손님들이 아침 식전부터 저녁까지 끊이지를 않아서, 식구들끼리만 오붓하게 밥 한번 먹어보는 것이 어머니의 소원이셨어요. 식구들끼리만이라고 해도 자식이 여덟이나 되지만, 그 아들딸을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대학교까지 다 공부시키셨어요. 위로 두 언니가 수녀원에 들어간 뒤 셋째 언니는 집에 데리고 있고 싶어 하셨는데 끝내 수녀가 되겠다고 해서 어머니가 우시면서 가지고 갈 이불과 요를 만드시던 생각이 납니다. 이런 부모님들 밑에서 형제들이 행복하게 사랑받고 자랐던 것이 제가 하느님께 가장 감사하는 일이지요.

 

오늘 긴 시간 많은 얘기 해 주시느라 애 많이 쓰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남 마리아 선생님께 있어 가톨릭 신앙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여쭈어보아도 될까요?

 

저는 지금도 할 수만 있으면 매일 미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매일 4시에 일어나서 평화방송으로 성체강복 영상을 보고, 5시부터는 묵주신공을 드리면서 시댁과 친정 양쪽 부모님으로부터 시작하여 돌아가신 모든 가족을 위하여 연도를 바치고, 6시에 새벽 미사를 참례하지요. 새벽 4시면 일어나는 셈인데, 밤에도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대부분이라서 잠이 모자라는 편입니다. 그래서 8시쯤에 한 시간 정도 쪽잠을 자기도 하지요. 매일 이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하고 있어요. 신기한 것이, 제가 작품을 구상하다가 막혔을 때, 미사를 드리면서 영성체를 하는 순간 고민하던 테마에 대한 영감을 받을 때가 많아요.

 

선생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남용우 화백의 유리화들은 철저하게 성경 내용에 입각한 작품 주제와 가톨릭의 성사들을 특징짓는 상징들이 풍부한 것으로 이름나 있는데 그 밑바탕에 이렇게 지극하신 신앙심이 받쳐주고 계셨군요. 정말 반포성당 누리집 코너의 명칭대로 선생님의 인생 그 자체가 하느님의 멋진 작품이십니다. 다치신 다리가 하루빨리 나으셔서 천진암성지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야외 유리 모자이크화들도 완성하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글을 읽으신 교우분들이 앞으로 우리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볼 때마다 선생님께서 이 작품들에 담으시려 했던 하느님 말씀을 새롭게 느끼실 것 같습니다.

 


 

이번 인터뷰에서 남용우 마리아님이 들려주신 한국 초대교회의 순교 역사와 가톨릭 유리화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한정된 지면에 모두 올려드리지 못하는 것이 무척 안타깝습니다. 마치는 글로 남 마리아 선생님께서 유리화 작품을 구상하실 때 마음에 새기신다고 하는 찬미가를 아래 적어드립니다. 다니엘 예언서에 나오는 찬가이며 성무일도 첫 주간 주일 또는 대축일 아침기도 때 바칩니다. 인터뷰하면서 정확한 출처를 받아오지 못했는데,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의 고석준 신부님께서 곧바로 알려주셨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노래지만 길어서 앞부분만 싣습니다.

 

찬가(Canticle) 다니엘 3,57-88.

 

57 주님의 업적들아, 모두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그분을 찬송하고 드높이 찬양하여라.

58 주님의 천사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그분을 찬송하고 드높이 찬양하여라.

59 하늘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그분을 찬송하고 드높이 찬양하여라.

60 하늘 위 물들아, 모두 주님을 찬미하라.

61 주님의 군대들아, 모두 주님을 찬미하라. 영원히 그분을 찬송하고 드높이 찬양하여라.

 

62 해와 달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Sun and Moon, bless the Lord)

영원히 그분을 찬송하고 드높이 찬양하여라.

63 하늘의 별들아 주님을 찬미하라.* (Stars of heaven, bless the Lord)

영원히 그분을 찬송하고 드높이 찬양하여라.

 

64 비와 이슬아, 모두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그분을 찬송하고 드높이 찬양하여라.

65 바람아, 모두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그분을 찬송하고 드높이 찬양하여라.

66 불과 열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그분을 찬송하고 드높이 찬양하여라.

67 추위와 더위야,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그분을 찬송하고 드높이 찬양하여라.

68 이슬과 소나기야,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그분을 찬송하고 드높이 찬양하여라.

69 서리와 추위야,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그분을 찬송하고 드높이 찬양하여라.

70 얼음과 눈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영원히 그분을 찬송하고 드높이 찬양하여라.

 

(후략)

 

인터뷰 진행 및 정리: 황수연 안젤라메리치(사목협의회 사회사목분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