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바오로 2세 의상디자이너 장명숙 안젤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인터뷰 진행 및 작성 : 문화분과장 박혜정 페트라

 

“자꾸만 뒤돌아보게 하는 분이세요”

 

올해 초 성전 입구에서 어느 자매님이 저에게 던진 話頭입니다. 저와 주변의 몇몇 분들이 異口同聲으로 공감을 표했습니다. 그 순간 여러 사람들을 ‘뒤돌아보게 하시는’그 분, ‘평일미사를 거르지 않고 오시는’ 그분에 대해 여러 가지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마침 문화분과 사목을 맡고 있는 저에게 그 궁금증을 풀어 줄 인터뷰 기회가 따스한 봄기운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성당 마당 아름드리 심겨진 꽃들로 마음까지 화창한 봄날에 패션디자이너 ∙ 무대의상디자이너 ∙ 교수 ∙ 유튜버이신 장명숙 안젤라 자매님과의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자매님 성함 앞에 붙은 호칭만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바쁘신 일정에 귀한 시간을 할애해 주시며 한 말씀 덧붙이셨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인데 당연히 해야지요. 감사합니다.”

 

 

안젤라 자매님과의 인터뷰는 거의 두 시간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그나마 인터뷰 전에 자매님이 언론을 통해 말씀하신 <69세 인생사, Draw My Life>를 사전에 페이퍼로 준비한 덕분에 그 시간 내에 담고 싶은 콘텐츠를 어느 정도는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는 여러 직업인으로서의 인생사와 천주교 신자 안젤라의 주님 만남 여정을 씨실날실의 스토리로 만들어보았습니다. 본격적인 인터뷰 전에 목이 종종 불편하시다는 말씀과 함께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이 먹으면서 목이 자주 불편합니다. 이것은 이제 나이 먹었으니 말을 줄이고 생각을 많이 하라는 하느님의 섭리시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을 序頭로 인터뷰에 임하셨습니다.

 

▶ 인생사를 크게 성장기 – 유학1기 – 활동1기 – 유학2기 – 활동2기 – 역경기 –  활동3기로 정리할 수 있었는데, 각 시기마다 선생님께 주님은 어떤 분이셨는지 청해 듣고 싶습니다. 어떤 계기로 주님을 알게 되셨고, 세례는 언제 받으셨는지요?

 

성장기라고 구분해 놓으신 시기, 태어나서 청 ∙ 장년기를 걸쳐 결혼 전까지는 주님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저는 불교집안에서 성장했거든요. 게다가 종종 집에서 굿도 하고 점도 치고 그런 집에서 자랐어요. 그런데 평소 관심은 있었습니다. 제가 오르간을 좋아해서 성당에서 연주되는 오르간 소리를 들으면 심금을 울리곤 했습니다. 그 때마다 내가 언제인가 종교를 선택하면 가톨릭을 가리라 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던 때가 중고등학생 때였지요. 이때부터 주님께서 부르신 것 같아요. 그러다가 26세 되던 1978년 유학 바로 전에 남편과 함께 반포성당 가건물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반포성당 변천사를 함께 한 사람 중에 한명이지요.”(웃음)

 

▶  결국 성장기 중 청소년기에 성당의 오르간 음색이 좋아서 주님께 관심을 갖게 되셨고 드디어 평생 동반자이신 남편분을 만나 결혼을 하신 후 함께 세례를 받으셨네요. 결혼 후 바로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셨는데 그 곳에서의 종교 활동은 어떠셨나요?

 

그 때는 예쁜 성당만 찾아서 겨우 주일미사만 참여했습니다. 그 중 주로 다닌 성당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으로 유명한 ‘산타마리아 델레그라쩨 성당’과 밀라노의 수호성인이신 ‘암브로지오 성인 성당’입니다. 다만 별 준비 없이 유학을 와서 언어장벽으로 고생을 했습니다. 덕분에 화살기도는 많이 했지요.”

 

▶  유학생활을 마치시고 1980년 가을에 귀국을 하셨습니다. 저는 다시 유학길에 오르신 1986년 전까지 이 시기를 활동1기로 정리했는데요. 이 시기 선생님의 패션디자이너로서의 활동 그 자체와 천주교 신자로서 안젤라의 직업관은 어떠했는지요?

 

이 시기가 제 인생에서 가장 바빴던 때입니다. 점심식사 할 시간이 없어서 건빵으로 때우곤 했으니까요. 이 때 귀국하자마자 사간동 ‘공간미술관’에서 국내 최초로 <패션일러스트레이션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전쟁 같았던 이탈리아 유학의 작은 결실 즉 최초의 밀라노 유학생이라는 타이틀 덕을 톡톡히 보았던 시절입니다.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아직 패션디자이너와 무대디자이너 학위를 가진 사람이 없었거든요. 국립국악원, 유수의 극단, 그리고 대학 등에서 손짓을 해서 디자이너 장명숙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이 시기에 주님께서 가장 멋진 선물들을 주셨습니다. 바로 저희 두 아들이 태어났고, 1983년 명동성당에서 교황님 의상 디자인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1984년 5월 우리나라에 방문하신 교황님께서 입으셨던 의상이 바로 제가 디자인한 옷입니다. 그 의상은 절두산 성지에 보관되어 있을 겁니다.

이어서 두 번째 유학을 준비 하던 중인 1986년 아시안게임 개폐막식 공식 의상디자이너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정말 살인적인 업무였답니다. 하지만 이 모두가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에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성황리에 행사를 마칠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너무 뿌듯한 경험이었습니다.이때가 바로 묵주기도를 처음 알게 되어 매일 열심히 묵주기도를 바치던 시기였습니다. 큰 은총이었지요.”

 

 

▶  그 시기 문화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하셨습니다. ‘86아시안 게임 업무를 마치자마자 다시 이탈리아 유학길에 오르시며 제2유학기를 열으셨고, 활동2기로 들어가신 1988년 귀국하신 후 활동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 시기에도 국내 외 패션사업에 큰 영향을 미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두 번째 유학은 가족들 없이 저 혼자 왔습니다. 마음이 무거웠지만 그 만큼 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시간을 쪼개어 살았습니다. 여러 활동과 공부를 했지만 특히 전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오페라하우스인 ‘스칼라좌’에서의 현장경험 즉, 예술이 탄생하는 과정을 지켜 볼 수 있었습니다. 그 경험이 1988년 귀국 후 토탈패션컴퍼니에 고문으로 일하며 새로운 브랜드를 탄생시키는 산파역할을 하는 데 커다란 동력으로 작용을 했습니다.

마침 ‘88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차에 스칼라좌 측에서 우리나라에 초청 제안을 해왔습니다. 이 제안을 올림픽조직위원회에 전달해서 ’스칼라좌‘ 국내 공연을 성사시켰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와 이탈리아 문화교류에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인정이 되어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답니다. 지나고 보니 이 모두가 다 하느님의 은총이었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우리 아이들에게 ’선한 의지를 가지고 살아라. 그러면 주님께서 길을 열어주신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  1988년 귀국 후 제2의 전성기를 맞으시어 동분서주하던 중 1994년 커다란 역경의 시기를 지내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래서 역경기라고 구분해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마음이 아픈 일이시지만 그 당시 주님께 매달리시던 그 은총을 기억하시면서 당시의 어려웠던 말씀과 주님과의 관계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네, 우선 개인적인 일로는 저희 가정에 청천벽력 같은 일이 생겼습니다. 1994년 겨울 우리 큰 아들이 生死를 넘나드는 큰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 때가 고3으로 수능 며칠 전이었는데 말입니다. 이 때 처음으로 내 인생을 오로지 엄마의 역할로만 쓰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를 했습니다. 그 때 입은 충격으로 한 달 만에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변했고, 이탈리아 말이 생각이 안날 정도로 혼비백산을 했답니다.

설상가상 당시 제가 근무하던 백화점 붕괴 사고가 나면서 함께 일하던 너무 많은 동료들이 하늘나라로 갔지요. 너무 큰 사건들 앞에 슬픔, 아픔..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제 감정을 들여다보면서도 달래 줄 경황도 없었어요. 그저 살아남기 위해 이를 악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사회적으로 또 하나의 환난은 1997년 IMF였습니다. 이로 인해 거의 모든 활동이 중단되었어요. 이 때 매 순간 제 스스로 되뇌이던 말이 있습니다. ‘그래 산이라면 넘고 강이라면 건너자 언제인가 끝이 보이겠지. 명숙아 이 시기를 잘 견디어 내면 나중에 큰 선물을 줄게’ 이렇게 제 자신을 다독이며 버텨냈습니다.

이후부터 봉사에 마음을 두고 주님 말씀과 주변 어려운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봉사의 기회를 찾고 있고, 어느 사이 봉사가 취미가 되었답니다.”

 

▶  이렇게 어려운 일은 늘 세트로 오더라고요. 선생님, 장하시고 존경합니다. 이제는 마지막 시기인 활동3기 이야기를 들어보겠는데요.. 특히 새로운 일을 시작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그리고 그 일을 통한 주님 말씀 실천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시지요.

 

2004년 두 아들을 모두 대학에 들여보내고 인간 장명숙의 삶을 다시 찾아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혼자 지내면서 책도 쓰고 여행도 하고.. 평소 하고 싶었던 일들도 마음껏 해보자 하며 그 실천으로 일 년의 절반은 밀라노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밀라노와 서울을 오가며 양국의 문화교류에 한몫을 하고 있지요. 이 자체로 저에게는 이 시간이 무척 뜻 깊고 보람 있는 시간이랍니다.

또 말씀하신대로 어린 시절 운명적으로 이끌렸던 이탈리아와의 인연이 드디어 결실을 맺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젊은 후배들로부터 유튜브 개설 권유가 들어온 거예요. 이렇게 지난 해 68세 나이에 운명같이 유튜브를 시작하게 되었답니다. 졸지에 유튜버가 된 거지요(웃음). 이렇게 호기심 많던 소녀가 할머니가 되어서도 여전히 새로운 일에 가슴이 설레었답니다. 물론 유튜브 수익금도 모두 후원단체에 보내고 있고요.”

 

 

▶  선생님, 오랜 시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 질문을 드리면서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하나는, 선생님과 같은 워킹맘들에게 꼭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해주시고요, 다른 하나는, 크리스챤 안젤라로서 우리 평신도들과 함께 나누고 싶으신 주님 말씀 한 구절을 듣고 싶습니다.

 

네. 부족한 사람을 위해 이렇게 많은 준비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답으로는 ‘일을 하면서 자아실현 욕구를 실천하며 내 삶을 가치 있게 만들기를 권장하고, 특히 자녀와 함께 있을 때 그 시간 최선을 다하세요.’입니다.

다음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저는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려고 오늘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말씀 중 ‘천년도 하루 같고 하루도 천년 같이 살아라.’라는 말씀에 대한 묵상입니다. 또 제가 힘들 때 읊곤 하는 詩가 있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이 시로 오늘 인터뷰에 대한 소감을 대신하겠습니다.”

 

제목은 <꽃자리>로 구상 詩人의 시입니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안젤라 자매님과의 인터뷰는 묵상으로 소개해 주신 주님의 말씀과 사순 2주간 주임 신부님의 강론 말씀으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바로 마지막 인터뷰 질문 답변 중 하나인 ‘천년도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안젤라 자매님의 주님 말씀 묵상과 ‘하루를 영원처럼’ 즉 ‘一日一生’으로 살아야 한다는 신부님 강론 말씀입니다.

 

◼장명숙 안젤라메디치(1952년 생)

인터뷰 일시 : 2021년 3월 17일(수) AM 11:00

장 소 : 수녀원 응접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