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듯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두 문장이 결합되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우선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말씀이 저를 곤혹스럽게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당당하게 대답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다고 대답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신앙의 토대가 허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저와 마찬가지로 이런 질문 앞에서 뭐라 대답해야할지 멈칫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노골적으로 직접 받은 제자가 한 사람 있습니다. 베드로입니다. 요한 21:15절 이하에 따르면 부활의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두 번째까지는 편안하게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세 번째 질문을 받고 근심했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속으로 찔리는 게 있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가장 잘 이해하고 따른다고 큰소리를 치다가 예수님이 체포당하고 생명이 위태롭게 되자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세 번이나 반복해서 발뺌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와 비슷합니다. 언제 어느 순간에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정할지 모릅니다. 평소에는 그럭저럭 신앙을 유지하지만 유사시에는 포기하거나 유보할 수도 있습니다. 코로나 펜데믹을 경험해본 우리로서는 내 신앙은 왜 이 정도 밖에 되지 못할까, 하고 자책하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신자들은 한발 뺄 준비를 한 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질문을 아예 받지 않으려는 겁니다. 구경꾼으로 남아 있으면 속이 편할지 모르나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만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불교는 신자들에게 부처를 사랑하라거나 부처를 믿으라거나 부처와의 관계를 정립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라고, 즉 자기 안에 있는 불성을 발견하라고 말합니다. 분별심을 없애라는 가르침은 오늘과 같은 개인주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역사적 인물인 예수를 믿으라고, 그를 사랑하라고, 그와의 관계를 결정하라고 반복해서 요구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되었고, 지금도 거기서만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주체성이 강한 현대 지성인들은 이런 요구를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예수 없이도 나 잘 살 수 있어, 하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당신안에 머무르라고 말씀하시고, 또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요구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이 짧은 문장 안에 ‘서로 사랑하여라.’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새 계명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라는 말씀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있거나, 사랑받고 있을 겁니다. 사랑은 예수님만 말씀하신 게 아니라 평범한 우리들도 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중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걸까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꼼꼼하게 보십시오. 그냥 사랑하라고만 말씀하신 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사랑이 주도적입니다. 그 사랑이 있었기에 우리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예수님에게 일어난 어떤 결정적인 사건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렸는데, 그게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먹을 걸 많이 주었다거나, 사회적 지위에 오르게 하였다거나, 마음에 드는 배우자를 만나게 했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 말고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얻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현대인들의 특징은 개인주의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런 특징을 점점 강하게 보입니다. 교회 일에 너무 깊이 연루되기를 싫어합니다. 신자들끼리의 사귐 없이도 하느님만 잘 믿으면 된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그런 마음도 이해가 됩니다. 자칫하면 교회생활로 인해서 개인적인 삶이 방해받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형편이 교회의 사귐에 깊이 참여할 수 없는 특별한 경우도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어느 정도까지 실천해야 하는지도 정확한 선을 긋기가 어렵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듯이 재산을 한데 모아서 필요한 대로 나눠 쓰는 원시공산주의 형태의 신앙생활은 불가능합니다. 저는 여기서 어떤 객관적인 기준을 정답으로 말씀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구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로서 그 사랑의 징표를 나타낼 수 있는 공동체적 사귐에 관심이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만 스스로에게 질문해보면 됩니다. 각자 성령으로부터 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2천 년 전 요한복음 기자가 전해준 주님의 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말씀은 우리에게 강력한 도전이고, 동시에 위로이며 희망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아니 주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새로운 계명에 상응하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찾아보고, 결단해야 하겠습니다. 잠시 묵상하겠습니다.